[동아광장]최규철/젊은 유권자들

  • 입력 2000년 3월 16일 19시 35분


한국 정치는 16대 총선을 계기로 크게 변할 수 있었다. 게임의 룰을 좀더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었고, 선거구도의 변화와 함께 후보들의 교체가능성도 컸다. 정치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그만큼 강했다는 말이다. 안팎으로 급변하는 시대 조류를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그럴만 했다. 그런데 정치 개혁 협상은 꼬였고 그 뒤풀이라도 하듯 지금 돌아가는 모양은 결국 ‘아니올시다’다. 밀실 공천싸움, 신당만들기, 3김정치 기름붓기, 자칭 불사조의 등장으로 우리 정치판은 다시 뒤틀린 모습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증오의 정치’다. 선거가 무슨 천지개벽인가. 사생결단하듯 악다구니를 쓰고 있으니 당선돼 모인다 한들 사무친 감정 때문에 무슨 일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선거때마다 강조돼 온 것이 정책 대결이다. 그러나 말이 정책 대결이지 두 마디째부터 상대방 헐뜯기만 되풀이해 온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이 이 증오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이번 선거의 특징 중 하나가 젊은세대의 움직임이다. 시민단체의 정치 개혁 요구 운동에 젊은층의 호응이 전례없이 높다. 이를 의식한 각 정파는 공천때부터 386세대(30대 나이에,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출생)후보를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막상 유권자의 허리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세대는 정치에 냉소적이고 불신감을 갖고 있으니 문제다. 그러나 위기 속이지만 기회는 있다. 만약 이들이 4월 13일 총선투표장에 줄을 선다면 우리 정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 정치 개혁의 불씨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유권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통상 젊은세대의 구분 기준에서 20∼35세까지의 유권자는 1300여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41%를 차지하고 있다. 96년 15대 총선때 이들의 투표율은 20대가 평균 44%, 30세에서 35세미만은 57%로 전체 평균 64%보다 낮다. 특히 20대의 경우 ‘정치무관심’ 응답률이 80%란 최근 조사 결과도 있다. 이들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중심 세력이다. 그런데도 정치무관심에 빠져 있다는 것은 정치가 헛돌았다는 뜻이다. 사회의 가장 역동적 핵심 부분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때 정치가 무슨 힘을 쓰겠는가. 정치인들은 이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동도 보여주지 못했고, 희망을 주는 정책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 젊은 유권자들의 생각이다. 젊은세대의 정치빈혈증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불었던 공화당 존 매케인후보 선풍뒤에는 정치 개혁을 바라는 X세대라 불리는 35세이하의 젊은세대가 있다. 92년 대선때의 로스 페로 열풍, 98년 프로 레슬러 제시 벤투라의 미네소타 주지사 당선뒤에도 무당파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었다. 미국 월간지 (The Atlantic Monthly, 99년 8월호)에 실린 X세대 의식 연구 내용을 보면 이들이 왜 매케인에게 끌리는지를 알 수 있다. “정당과의 연대 의식은 대단히 약하다. 개인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이다. 가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관심이 크다. 적자 없는 균형예산, 교육 등 사회투자 확충, 환경보존을 지지한다. 특히 선거자금규제 등 정치 개혁을 바라고 있다. 대부분 X세대들은 심각한 임금 격차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점차 내향적이고 보수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매케인의 정치 노선과 가까운 부분이 많다. 우리 젊은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젊은 표를 얻어야겠다면서도 각 정파는 선거판에만 들어서면 표변한다. 상대방 헐뜯기에 혈안이니 선거가 싸움판인가. 상호 비방과 흑색선전은 정치혐오증을 증폭시켜 투표율을 떨어뜨린다는 학계 일부의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젊은 신인후보가 없어서 젊은층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 그렇지 않다. 정책 능력이 없었고, 정책 공방을 벌일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때가 돼서야 급히 만든 공약을 내놓고 정책 운운한다면 웃기는 일이다. 정당의 이념과 체취가 배어 있지 않은, 급조된 공약을 특히 젊은 유권자들은 믿지 않는다.

이번 총선에서도 공약 발표라는 시늉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정책 토론은 별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실망하고 물러설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누군가가 이 ‘아니올시다’ 정치판에 개혁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젊은 유권자들이 결단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투표가 개혁이다.

최규철<심의연구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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