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새천년]'한민족 네트워크化'로 동질성 회복부터

  • 입력 2000년 3월 1일 19시 31분


"신의 옷자락이 역사를 스칠 때 그 옷자락의 솔기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19세기말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민족. 남북한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노래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은 높기만 하다. 체제변화를 거부하는 북한과 마땅한 대화통로조차 확보하지 못한 게 남북관계의 현주소다.

언제쯤 남북한은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통일이라는 ‘신의 옷자락’을 거머쥘 수 있을까. 과연 10년안에는 분단의 고통을 떨쳐내고 남북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꼭 10년전 독일은 세계인의 축복 속에 통일을 이뤄냈다. 베를린 장벽붕괴 이후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그 통일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도 함께 흥분했다. 독일인들이 베를린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으로 각종 기념물을 만들 때 우리도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으로 기념품을 만들게 될 날을 그렸다.

그러나 독일과 한국은 역사적 상황과 경제적 역량이 다르다. 독일은 70년대 초반부터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계속하면서 통일의 기회를 노렸고 마침내 그 기회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거머쥐었다. 새정부 출범후 남북간에 금강산관광이 실현되는 등 과거엔 생각지도 못했던 교류가 시작됐지만 아직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정부간 불신과 국민들이 느끼는 위화감도 독일보다 훨씬 크다. 독일이 통일후 10년간 사용한 9000억달러의 엄청난 비용도 우리에게는 부담스럽다.

이로 인해 아직은 통일 열차의 종착역이 어디쯤일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게 안타깝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인터넷을 앞세운 컴퓨터문화의 급속한 확산은 우리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이를 반영하듯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역사적인 명제도 국민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인상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남북한 통일’에 앞서 ‘경제회복’ ‘취업률 100% 달성’ 등 개인 생활상에 관련된 항목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좋든 싫든 통일문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분단구조의 일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남북주민 간의 이질화는 물론이고 서로 간의 체제경쟁을 위한 역량의 낭비가 지속되고 있다. 선거 때마다 북한과의 연계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나 총풍(銃風) 또는 북풍(北風)으로 희화화된 정치적 대결도 모두 분단구조에서 비롯된 것. IMF 상황에서 외국자본 유치가 쉽지 않았던 배경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라는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통일을 반드시 이룩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이같은 분단의 질곡(桎梏)에서 헤어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을 이루면 분단으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남북이 번영의 길로 달려갈 수 있을까. 경남대 북한대학원 류길재(柳吉在)교수는 “통일 화두(話頭)가 우리 민족에게 반드시 긍정의 개념만은 아닐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반세기동안 고착된 분단구조가 바뀌는 과정에 상당한 혼란이 수반될 수 있다는 사실이 통일 명제의 당위와 현실 간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는 얘기다.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5.3%는 통일예상시기를 ‘10년∼20년 뒤’로 판단하고 ‘점진적인 통일’(82.6%)을 이뤄야 한다고 답했다. 이른바 ‘흡수통일’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준비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통일이 언제 어떤 형태로 시작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북한주민들의 남행(南行) 러시(Rush)가 통일의 전주곡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체적인 예상이다.

북한체제의 붕괴에 따라 ‘1민족 1국가 1체제’를 향한 통일과정이 시작될 경우 갖가지 분쟁과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 북한지역의 땅문서를 보관중인 실향민들이 북한내 ‘자기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면 현실적인 거주자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생길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도착한 뒤 가장 큰 불만으로 제기하는 것 중의 하나인 북한에서의 학습경력 및 능력 인정 문제도 골칫거리. 무작정 북한 학제를 외면하는 것은 남북한의 통합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북한에서의 교육내용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와 동의학(東醫學)을 주로 배운 북한의사들에게 곧바로 의사 자격을 인정해주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그런가 하면 북한의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한국예술사(史)’ 안으로 수용하는 것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들은 주체사상에 입각해 통일한국에서는 한갓 ‘허접쓰레기’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나름대로 그 속에 내재한 예술적 고민을 읽어 선별적으로라도 수용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누구도 미리 정답을 얘기하거나 제시하기 힘든 문제들이다. 그렇다고 통일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남북이 가진 장점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기대감에서다.

상황은 다르지만 90년대초 동구권 몰락 직후 80여만명의 대량이주민을 단기간에 받아들인 이스라엘은 그들만의 독특한 이주민정책을 통해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해외 유태인들의 고급두뇌를 활용,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을 실시해 각종 하이테크 기술을 상품화한 것. 약 10년간 이어진 매년 7%의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러시아 등지에서 교육받은 북한의 순수과학자들을 활용, 각종 첨단산업을 상품화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게 통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근면한 북한주민들의 노동력도 긍정적인 요소다. 북한주민의 이동이 단기간에는 다소 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준비된 상황에서 관리만 한다면 긍정적인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한국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 제시된 청사진의 하나가 ‘모델 코리아(Model Korea)’.

단순히 지리적 차원의 민족국가를 넘어 전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엮는 ‘민족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다. 통일연구원 허문영(許文寧)통일정책실장은 “통일은 단지 남북한만의 결합이 아니고 지구상의 온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 민족고유의 정서와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결합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한이 겪은 자유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 경험에서 장점을 모아 우리 민족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개발도상국 등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북은 국가와 제도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전에도 민족의 동질성을 높여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일이 ‘됐다’ ‘안됐다’라고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 보다 어느 정도 통일의 과정이 진행됐느냐를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

정부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법적인 통일’에 앞서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자는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북한경제가 정상화될 경우 통일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금강산관광을 다녀오고 경제협력을 위해 평양을 드나드는 지금 통일의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키워드:통일비용▼

통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경제적 비용. 통일시점과 통일방식, 통일목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문제는 대부분 천문학적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통일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동안 국내외 연구기관과 전문가들이 추산한 통일비용은 412억달러에서 최대 2조5000억달러.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북한붕괴에 따라 급진적인 흡수통일이 이뤄질 경우 남북간 소득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위기관리비용 5248억달러와 투자비용 366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통일비용 논의가 시작된 것은 독일통일과정을 지켜보면서부터.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후 ‘북한붕괴론’이 제기되면서 이 문제는 시급한 현안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북한체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이 논의도 상당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감수하고 있는 ‘분단비용’을 고려할 때 통일비용은 현실적으로 이익이라는 주장만은 꾸준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북한의 군사비. 99년의 국방비는 남(114억5750만달러)과 북(13억6000만달러)을 합쳐 128억1750만달러에 이른다.

통일이 되면 이를 3분의1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는 것. 이를 통일비용으로 활용할 경우 왜곡된 자원분배 및 경제구조도 정상화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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