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명절을 '가족이해' 장으로

  • 입력 2000년 2월 7일 19시 48분


수많은 사람이 힘든 여정을 마다 않고 고향에 다녀왔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시점. 어쩌면 적지 않은 사람이 명절 후유증으로 우울해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몇 해 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명절 증후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명절 증후군은 ‘명절 노동’(상차리기와 손님 접대 등)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불만이 주부들에게 특히 많다고 해서 ‘주부 직업병’ ‘주부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러나 주부들만의 일이랴. 고부간 부부간 부모자식간 동서간의 불화나 불편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일 터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명절은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가족간 우애와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축제였다. 그러나 명절 증후군은 명절이 가족 구성원 사이의 불만과 불화가 노출되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명절은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아닌가. 가족 공동체라고 해서 ‘문화적 충돌’이 없을 수 있을까.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 문화는 동양의 유교사상과 농경사회에 뿌리를 두고 형성됐다. 그러나 산업화 도시화 남녀평등 개인주의 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한 젊은 세대에게 명절이나 제사는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논리의 비약과 확대에는 한계가 없는 것일까. ‘제사는 남성들만의 축제이며 남성이 사회의 모든 가치와 재산과 권력을 계승해가고 있다는 사내들만의 은밀한 축제’로까지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한 50대 여성 작가는 ‘나는 제사가 싫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조상은 여성의 혼을 파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괴물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런 주장에 대해 전통론자들은 “전통문화를 무너뜨리고 뿌리를 없앤다면 어찌 문화민족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박한다.

전통적인 명절 의식과 상차림이 변하기 시작한 지도 오래이다. TV는 인터넷을 통해 차례를 지내는 ‘첨단 사이버 명절’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있는 명절 차례나 제사가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가족을 위한 명절이지 명절을 위한 가족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명절이나 제사가 사라진들 무슨 큰 일인가. 가족 자체가 해체 위기에 놓여 있는 시대에. 세대간의 벽은 부모 자식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언어마저 찾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10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출과 원조교제는 가족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가족 제도나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그러나 급격한 가족의 붕괴를 겪어온 서구사회가 직면한 현실은 아직도 가족을 대체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명절 후유증은 가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승화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과는 비생산적일 수밖에 없다.

<권순택기자>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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