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위헌론 딜레마

  • 입력 2000년 2월 3일 17시 46분


한나라당의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웬만해선 내놓은 말을 주워담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신의와 원칙을 중시하고 법치를 강조한다는 평도 듣는다. ‘대쪽’ ‘법대로’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법정신에 입각해 소신 원칙을 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강단을 보여왔다. 그 자신 97년 대선때 펴낸 책 제목을 ‘아름다운 원칙’이라고 붙일 정도로 원칙주의자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회창총재의 '원칙' 실종▼

그러나 최근 여야의 선거법 개정 협상에서 보인 이총재의 언행은 그런 평가를 재평가해 보게 한다. 말바꾸기가 드러나고 원칙과 소신이 분명히 읽히지 않는다. 들이대는 법의 잣대도 ‘법대로’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간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70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게임의 룰인 선거법조차 아직 정비하지 못한 여야의 행태는 함께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일이 그렇게 된 데는 이총재의 자세에 보다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선거법 개정안을 설 전에 처리하지 못한 것은 큰 두가지 쟁점에 여야의 의견이 맞섰기 때문이다. 국회 선거구획정위가 내놓은 지역구 26석 감축안과 민주당이 제기한 1인2표제 도입안이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안 모두 위헌공방에 휘말려 있다. 한나라당은 획정위의 의석 감축안이 헌법재판소가 기준을 잡아 준 선거구 인구 상하한선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민주당은 모든 국회의원은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헌법이 명시하고 있으니 지역구의원 후보가 받은 표로 비례대표 의원을 결정하는 현 1인1표제는 위헌이라는 주장이다. 이총재는 두 문제를 상반된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우선 지역구 감축안의 경우를 보자. 안을 낸 선거구획정위는 이총재가 제안해 전격 구성된 기구다. 그는 기구구성 당시 “획정위가 의원 정수를 결정해 주면 전적으로 존중해 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말에 힘입어 여야 총무들은 의원정수와 지역구 조정을 획정위에 사실상 백지위임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다짐과 합의는 1주일만에 깨졌다. 획정위가 의원 정수를 현재의 10%, 26명 감축하자며 ‘35만∼9만명’의 인구 상하한선을 확정할 때도 한나라당은 별이의를 달지 않았었다. 그러다 뒤늦게 선거구가 없어지는 의원들이 들고나서자 ‘위헌 소지’를 주장했고 지역구를 10개만 줄이는 ‘31만∼9만명’안을 냈다. “개별 선거구 인구는 선거구 평균인구의 ±60%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한 95년 헌재의 다수의견을 좇아 위헌주장을 편 것이다. 그같은 주장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획정위의 의원 정수 감축조정에 전적으로 승복하겠다던 다짐과 원칙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이다.

지역구 감축에는 위헌주장을 편 이총재가 1인1표제의 위헌시비에는 명확한 법률적 대응논리 없이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헌법 41조가 국회의원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로 선출한다고 명시한 만큼 비례대표의원도 지역구의원과 별도의 표로 뽑아야 직접선거 요건을 갖춘다는 데는 헌법학자들이나 야당의원 일부도 동의하고 있다. 정당 지지가 아니라 정당이 내건 인물군(群)을 보고 판단해 찍은 표로 비례대표를 뽑는 것은 이 제도를 둔 나라에서는 예외없이 실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총재는 “1인2표제는 우리의 정치문화에 맞지 않는다”는 말로 이를 일축한다. 위헌이라는 주장에 어째서 위헌이 아니라는 반박 대신 정치문화를 얘기하는 것은 이상하다. 자신은 헌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남의 주장은 법 아닌 문화차원으로 돌리는 건 논리적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1월 중순 선거법 ‘개악’에 여야가 합의했을 당시 1인2표제를 수용하지 않았는가.

▼法理 대신 정치문화론 대응▼

국민은 선거법 개정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유를 기본적으로 여야의 당리당략 탓으로 본다. 여야의 서로 다른 위헌 주장도 자신의 강세지역 선거구를 하나라도 더 살리거나 취약지역에 파고들려는 당략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치지도자는 말이나 논리에 일관성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헌법에 배치되는 법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이총재의 생각은 옳다. 그렇다면 약속한 대로 의원정수 26명 감축은 수용하고 그에 맞춘 인구 상하한선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위헌을 둘러싼 법리논쟁도 같은 법리논쟁으로 맞서야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다.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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