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경제 이래서 강하다]벤처 캐피털

  • 입력 2000년 1월 6일 19시 39분


미국에서 매년 상장되는 기업 수는 유럽 전체의 4배에 이른다. 그렇다고 미국의 전체 기업수가 유럽의 4배인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많은 기업이 생기고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때문이라고 미국은 자부한다.

그런 신규기업에서 기존 판도를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돌파형 기술이 나온다. 그러나 창업에는 자금이 소요된다. 차고에서 기업을 일으키는 시대는 지났다. 투자하는 사람도 창업주처럼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미국에 그토록 많은 기업이 생겨날 수 없다. 그런 정신을 가진 투자자들이 벤처 캐피털리스트다.

이들은 종종 ‘Vulture Capitalist(독수리 자본가)’로도 불린다. 한푼이 아쉬운 창업주들을 압박해 경영권이나 소유권을 유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실리콘 밸리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다. 시쿼이어 캐피털, 시에라 벤처스, 메이필드 펀드, 뉴 엔터프라이즈 어소시에이츠, 테크놀러지 벤처 인베스터스 등이다.

‘보이지 않는 손’ 가운데 가장 큰 손은 클라이너 퍼킨스 커필드 앤 바이어스(KP). 이 회사는 1972년 창업 이후 1997년까지 14억달러를 모아 300여개 회사의 창업을 지원했다. KP가 지원한 회사들의 1997년 현재 주식시가총액은 1250억달러, 연간수입은 610억달러에 이른다. 이같은 투자의 대가로 KP도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였다. 1997년 이후에도 아마존, 선마이크로시스템, 아메리칸 온 라인같은 KP지원회사들의 주가가 폭등했다. KP지원의 파급효과는 한 마디로 계량하기 어렵다.

창업자인 진 클라이너와 톰 퍼킨스가 은퇴한 뒤 파트너들의 공동책임제로 운영되는 이 회사의 실질적 대표 파트너는 존 도어(50). 그의 별명은 ‘실리콘 밸리의 빌 게이츠’. 스스로도 3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이력서에 적을 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 벤처 캐피털의 성공률도 높지는 않다. 이 회사가 지원한 창업회사 10개 중 5개는 수년 안에 망한다. 4개가 무난한 성적을 올리고 1개 정도가 홈런을 친다. 그러나 그 1개의 홈런이 미국경제를 바꾸고 세계경제의 변화를 주도한다.

이 회사는 창립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800만달러를 펀드로 조성했으나 투자에 2년 연속 실패했다. 그러나 150만달러를 투자한 탠덤 컴퓨터가 대히트를 쳐 8배인 2억2000만달러의 투자수익을 올리면서 궤도에 올랐다. 이어 1976년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생명공학회사 지넨테크에 20만달러를 투자했다. 지넨테크가 두뇌호르몬 개발에 성공한 뒤 기업을 상장, 무려 800배인 1억6000만달러의 투자수익을 올리면서 벤처 캐피털의 시대가 열렸다.

그후 KP를 모방한 벤처 캐피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미국 정보산업의 도약과정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자금을 댔다. 이들의 투자위험도를 비웃던 보수적인 은행들도 이제는 벤처 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1998년 190억달러였던 벤처 캐피털의 펀드 조성액이 99년에는 360억달러로 87%나 늘었다.

▼KP 왜 인기높나?▼

클라이너 퍼킨스(KP)는 투자자들에게 불리한 조건의 펀드를 조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수익이 나든말든 총 조성액의 2%를 펀드관리비로 떼고 투자수익이 발생하면 30%를 챙긴다. 다른 벤처 캐피탈은 20% 이상 떼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KP에 돈을 집어넣으려 한다.

KP의 투자수익률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KP의 장점은 10여명의 파트너들이 모두 기술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창업자 진 클라이너는 교습기계 Edex를 개발해 톰 퍼킨스는 레이저를 이용한 재봉기술로 돈을 벌었다. 대표 파트너 존 도어도 인텔 출신.

이들은 기술개발 초기단계부터 기술의 성패를 알아보고 조기투자할 수 있다. 이미 KP가 지원한 300여개의 창업회사들이 KP를 중심으로 계열화돼 서로 도와줄 수 있다는 점도 큰 강점이다.

그러나 아무나 KP에 돈을 집어넣을 수는 없다. KP가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KP는 무한팽창을 꺼려 자신들이 관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투자자를 고른다. 이 때문에 KP의 낙점을 받은 투자자들이 미국의 신(新)상류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1996년에 조성한 3억2800만달러의 KPCB펀드에 자금을 출연한 명단을 보면 미국 신엘리트집단의 서열이 드러난다는 얘기도 있다. 대학으로는 하버드대 예일대가 2000만달러, 스탠퍼드대가 1500만달러, 듀크대 MIT대가 1000만달러, 미시간대 반더빌트대가 500만달러를 출연했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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