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잃어버린 1년

  • 입력 2000년 1월 5일 00시 28분


1999년 12월 31일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새 밀레니엄의 도래를 반기는 축제가 끝없이 이어졌다.

제일 먼저 두 번째 천년을 마감한 뉴질랜드 북섬에서부터 터져 나온 카운트다운과 폭죽 소리는 지구를 한바퀴 돌아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에 가서야 잦아들었다.

이번 밀레니엄 축제는 ‘미디어 스펙터클’이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는 세계적 미항 시드니의 불꽃축제, 피라미드와 최첨단 레이저빔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집트의 현대적 오페라 공연, 에펠탑 전체가 형형색색의 불꽃을 뿜어내는 거대한 로켓으로 변신해 버린 파리의 밤거리 등 수천 수만㎞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축하 행사는 텔레비전 전파와 인터넷 통신망을 타고 릴레이식으로 이어져 인간의 역사에서 처음 보는 거대한 ‘지구촌 잔치’가 되었다.

▼ 새천년 시작은 2001년 ▼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철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어 거기에 탐닉하는 점에서도 인간은 극히 희귀한 동물임에 분명하다. 지구촌의 밀레니엄 잔치는 이 탐닉의 정도가 십진법의 수학적 원리를 간단히 묵살해 버릴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밤새워 즐긴 ‘새 천년’ 맞이 잔치의 여흥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시점이라 매우 외람된 말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인 만큼 그래도 사실관계는 분명하게 짚고 가야겠다.

다름이 아니라 초등학교 교실에서 진리로 통용되는 십진법의 원리에 따르면 전세계가 ‘새 천년’을 맞느라 호들갑을 떨었지만 ‘헌 천년’이 정말로 끝나려면 앞으로 무려 열두 달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2000년 1월 1일을 새 천년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가 ‘건수’를 찾기만 하면 어떻게든 놀이판을 벌이고야 마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이 본능을 자극해서 비즈니스를 키워보려는 미디어 산업의 ‘후천적 소유욕’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에 발생하는 컴퓨터의 연도표기 인식 오류(Y2K) 문제가 이러한 ‘착각’에 한 몫을 한 점도 빠뜨려서는 안되겠지만.

만약 세번째 천년이 서기 2000년 1월 1일에 시작됐다면 두번째 천년은 서기 1000년 1월 1일에 시작됐던 셈이다. 그럼 첫번째 천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같은 계산법을 적용하면 서기 0년 1월 1일이다. 하지만 서기 0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역사가들은 애초부터 불확실했던 예수 탄생 시점을 기준으로 역사를 기원전(BC·Before Christ)과 서기(AD·Anno Domini)로 나누면서 서기 1년 1월 1일을 기원전 1년 12월 31일 바로 다음에 붙여놓았다. 알다시피 1년은 열두달 52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 날 사이에는 두 달은 고사하고 단 0.1초도 들어설 틈이 없다. 2000년 1월 1일을 뉴 밀레니엄의 기점으로 선포함으로써 인류는 1년이라는 긴 시간을 영원히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몇몇 고집스러운 수학적 원리의 신봉자들 말고는 누구도 그 ‘잃어버린 1년’을 돌려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걸 되찾는다고 해서 더 행복해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탓이다.

게다가 예수 탄생이 서기 1년이 아니라 그보다 몇 해 앞선다고 하는 유력한 학설까지 있는 판국에 서기 0년을 빠뜨린 걸 가지고 고대 역사 기록자들을 타박해 보아야 별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 또 한번의 잔치 나쁠 것 없어 ▼

어쨌든 뉴 밀레니엄을 명분 삼아 선물을 주고받고 거나한 술기운과 더불어 황홀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새 천년의 첫 새벽’을 맞이하는 즐거움을 1년 앞당겨 맛볼 수 있었으니 무엇 하러 시비를 걸겠는가.

두고볼 일이다. 뉴 밀레니엄의 원년이라는 2000년이 다 저물기 전에 이 ‘의도적인 계산착오’에 시비를 걸면서 진짜 뉴 밀레니엄을 맞아 다시 한번 잔치판을 벌이자는 제안을 할 사람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하기야 그런들 어떠랴. 가버린 시대가 남겨준 미움과 편견의 자리에 사랑과 관용을 채우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야 새 천년 맞이 축제를 또 한번 열어서 나쁠 것 없지 않겠는가.

유시민 <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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