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0)

  • 입력 1999년 12월 17일 19시 23분


나는 그렇다고 해서 곧장 그에게 그러면 전쟁은 가난은 굶주림은 어떻게 되느냐고 들이대지는 않았습니다. 이 선생은 계속해서 말했어요.

성불한 부처는 다시는 윤회로 되돌아오지 않는다지만, 나는 윤회도 어쩌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자신만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고 굳게 믿지만 말이오. 그건 수백만 겁의 우연을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비유 되었어요. 그러니 벌레의 신체 일부분이 되든가 아니면 좀 더 근사하게 언덕에 서있는 소나무가 되어 바람에 잎을 살랑일 수도 있잖아. 동이든 서든 이곳에 사람이 지은 산업화와 도시는 지옥이오.

우리가 지구에 나타난 건 얼마 안되었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 사람이니까.

기술과 성장이라는 물길에 잘못 들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수 없이 자멸을 향해서 폭포로 휩쓸려 내려가는 중이오. 사람은 본래 최고의 창조물인데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미물들 보다 더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나는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지만 참을성 있게 말했어요.

우선 사람끼리의 관계를 수정해야지요.

지금같은 방식으로는 관계가 바뀌지 않아요. 삶 자체가 전환되어야 해요.

내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생산 관계와 현실적인 권력은 모두 장악되어 있는데. 누가 어떻게 하다못해 새마음 운동으로 바꿀 수 있나요?

시스템이나 문명이냐 하는 얘기로는 오늘 밤 안으로 끝나지 않겠는데.

나는 이젠 신랄하게 말을 꺼냈어요.

여기 녹색당 깃발을 보니까 보라색이더군요. 적기의 빨강에다 파랑을 덧칠해 놓은 거잖아요. 그게 개량주의 아니면 뭔가요. 혁명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까 새생활 운동으로 오래 두고 보겠다 그거 아녜요? 이런 일을 누군가 정의했든데…. 흡수된 공격력이라구요. 대자본은 그런 실천쯤 기획하고 콘트롤할 수 있어요.

여름의 번성이 숲의 성장과 밀도를 지나치게 가져오면 비바람과 홍수가 휩쓸어서 과영양이며 부패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은 자연 순환의 이치요. 그리고 나서 가을의 알곡과 열매가 찾아 오잖아요. 문명은 자연과 사람의 합치된 노력에 의해서만 전환됩니다. 알맹이를 바꾸면 껍데기는 붕괴하거나 새로운 모양이 될거요. 다음 얘기는 어떤 이의 비유인데 적절한 것 같아서 내가 인용해 보죠. 어느 농장 일꾼이 감독에게서 일을 맡았는데 날마다 소의 마릿수를 세는 일이었어요. 일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울타리로 나가 방목 중인 소의 숫자를 헤아려 감독에게, 이를테면 서른 두 마리가 있다고 보고했어요. 하루는 울타리 가에 나갔더니 늙은 농부가 기대어 섰다가 물어 보더랍니다. 당신은 아침마다 여기서 뭘하는 거요, 그래서 소의 숫자를 세어 보러 온다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늙은 농부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리더래요. 소의 숫자를 매일 세어서는 소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법이라오. 일꾼은 노인이 어리석은 말을 한다고만 여겼어요. 어느날 일꾼이 울타리 가에 갔더니 소가 서른 한 마리 밖에 없어. 그래 감독에게 돌아와서 소의 숫자가 모자란다고 얘기했지. 그들이 덤불 속을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죽은 소 한 마리가 발견되었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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