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더이상 '이근안'은 없는가

  • 입력 1999년 10월 29일 18시 56분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전경감의 자수로 큰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그의 행방을 두고 그동안 자살설로부터 제거설 해외잠적설 등이 난무했으나 그는 거의 자기집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제 그의 자수동기 도피경로와 구체적 고문혐의내용 등을 밝혀낼 차례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대목은 그동안 제기됐던 ‘못잡나 안잡나’에 대한 의문과 비호세력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88년 지명수배된 이래 11년간의 도피생활은 이씨로서는 고통과 번민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대공수사관으로 일해온 자신의 처지를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상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으로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문이라는 반(反)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이 나라 어디에도 숨을 수 없고 반드시 단죄된다는 교훈을 남겨야 한다. 이씨가 응분의 법적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더욱이 적지않은 피해자들이 아직도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고문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이씨의 고문은 한 대공수사관의 개인적 일탈행위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반(反)인권적 수사시스템과 수사의식 내지 수사관습을 대변한다. 그가 받은 수많은 표창과 수차례의 특진은 대공수사에 대한 정권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잘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악랄했던 그의 고문범죄가 조금이라도 희석돼서는 안된다. 당시 정권의 부도덕성은 별도의 규탄대상일 뿐이다.

이씨는 도피 첫 1년간을 제외하고는 집 내부를 개조해 식구들과 함께 지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경찰과 검찰의 추적전담반은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그는 성형수술로 얼굴모습을 바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가택수색은 물론 경찰과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는 점은 어이없는 일이다. 아예 수사를 포기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비호세력이 있었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이근안’으로 상징되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인권침해 행태를 동반하고 21세기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지금도 수없이 자행되고 있는 각종 인권침해 사례들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큰 이슈로 등장한 도청과 불법 감청, 불법 계좌추적 등 사생활침해를 비롯해 버려야 할 유산은 도처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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