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귀농자 脫農 현상 뚜렷…"농촌생활 환상?"

  • 입력 1999년 10월 19일 20시 09분


97년 5월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충북 보은군 수한면 질신리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이대희씨(49)는 최근 다시 대전으로 이사했다.

2년여 전 고향을 찾았을 때는 ‘땅에 대한 믿음’으로 희망에 부풀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후회와 빚더미뿐이다.

이씨는 귀농 당시 전재산 1억여원으로 논밭을 각각 4000여평씩 산 뒤 오이농사를 시작했다. 첫해에는 오이를 박스(15㎏)당 2400원씩 팔아 20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 작년말부터 두드러져

그러나 괜찮을 것 같던 농촌 생활도 잠시, 지난해와 올해는 오이값이 박스당 700원을 밑돌아 결국 3000여만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이씨는 결국 농사를 포기하고 대전으로 이사해 소형 화물차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

이처럼 귀농자가 농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떠나는 탈농(脫農)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전후해 실직자 등이 농촌을 찾는 귀농현상이 두드러졌으나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귀농자가 크게 줄어든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귀농자가 다시 도시로 떠나는 탈농현상이 뚜렷해졌다.

◇ 영농실패 가장 많아

19일 농림부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가구는 6409가구. 그러나 올해는 7월말 현재 3217가구로 지난해의 50% 수준. 귀농은 주로 4∼6월에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의 귀농가구는 지난해의 60%를 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귀농자가 다시 도시로 U턴하는 탈농 사례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탈농가구는 97년 158가구에서 지난해 493가구로 급증했고 올해는 7월까지 142가구로 집계됐다.

탈농 사례가 가장 많은 전남지역의 경우 97년부터 올 8월말까지 귀농 2688가구 가운데 216가구(8%)가, 경북지역은 1144가구 중 152가구(13%)가 다시 도시로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부 관계자는 “경제상황이 좀 나아지기 시작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탈농자가 크게 늘고 있다”며 “올해도 농사철이 끝나는 11∼12월에 탈농자가 부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탈농의 계기는 대부분 영농실패. 경기회복에 따라 도시지역의 일자리가 늘어난 점도 또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98년 2월 명예퇴직한 뒤 부산에서 진주시 대곡면으로 귀농했던 K씨(45)는 1년여 만인 올 3월 3000여만원을 날린 채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다. 비닐하우스 8동을 임대해 깻잎 농사를 지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제대로 수확조차 못했던 것.

귀농자에 대한 행정당국의 지원 부족도 탈농을 부추기고 있다.

귀농자들에 따르면 경제성있는 농사를 짓기 위해선 농지 및 주택 구입, 1년간의 영농비 등 최소 1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귀농자에 대한 정부의 자금지원은 2000만원(2년거치 3년 분할상환)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보증인과 담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남지역의 경우 영농정착자금을 대출받은 귀농자가 한명도 없을 정도다.

◇정부 자금지원도 부족

D건설 해외영업부장을 끝으로 지난해 충북 괴산군 정안면 조천리로 귀농한 안희상씨(51)는 “최근 면사무소에 영농창업자금에 대해 문의했으나 직원이 ‘그런 제도가 있느냐’고 되물어 더이상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농림부 관계자는 “2000만원 대출은 기존 농민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라며 “귀농자라고 무조건 지원해주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이병철(李炳哲)본부장은 “IMF 이후의 귀농은 대부분 뚜렷한 목표나 준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탈농현상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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