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통제받지 않는 '권력의 귀'

  • 입력 1999년 10월 18일 19시 55분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의 ‘국가정보원 감청 의혹’ 주장이 15대 마지막 정기국회마저 여야의 ‘충돌 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의 대국민 사죄를 요구하는 한편 국회 윤리위원회에 이의원을 제소하겠다고 한다.

국정원은 한술 더 떠 국회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할 것을 검토 중이다. 감청설비 실사를 요구하는 한나라당은 국정원에 대한 감사를 중단했고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조사도 좋고 고발도 좋다.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오막살이를 짓는 데도 순서가 있는 법, 우선 앞뒤를 분명히 하자. 천용택 국정원장은 ‘8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국가정보원이 필요하면 감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국정원 ‘8국’의 감청 활동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범위에 머물렀고 적법한 절차를 밟았는지 여부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이부영 의원은 이번 발언에 대한 법률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설령 이총무의 발언이 국회법 위반이라 하더라도, 그의 발언은 헌법의 기본질서와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하고 정당한 행위로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정부 여당은 이번 논란의 역사적 사회심리적 배경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정치적 목적의 불법 도청을 일삼았다는 것은 김대중대통령과 천용택원장도 알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정부도 그 진상을 밝히거나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으로서는 지금도 국정원이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당연하다.

‘국가안보 관련 감청’이라는 명분이야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감청이 ‘국가안보와 관련돼 있는지’는 오로지 국정원 간부들이 판단한다는 데 있다. 감청의 대상과 범위를 모르면 정말 그런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으로 감청을 하는지 누구도 따질 수 없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어제의 여당’이다. 야당 총재와 국회의원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정치를 했다. 문민정부 시절 여당에 들어간 재야 출신 정치인들도 96년 총선에서 안기부가 제공하는 ‘유용한 정보’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야당의 주장은 떳떳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경험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야당과 국민은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두려워한다. 국정원은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 한 사람만의 통제를 받는다. 대통령을 믿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국정원도 믿을 수 없다. 대통령조차도 확실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시각까지 있다. 국민을 대신해 통제를 하는 곳이 국회 정보위원회지만 제대로 정보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야당 위원들이 실질적인 통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국민이 선뜻 믿어주지 않는 것은 국정원이 통제받지 않는 권력기관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최소한 국회 정보위원회의 여야 의원들에게라도 국정원의 감청 설비와 관련 자료를 남김없이 보여 주라. 그러면 다시는 도청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국정원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야 두려워할 것이 무에 있는가? 그렇게 하면서 그들이 직무수행상 알게 된 국가기밀을 누설하면 정말 엄정하게 처벌하자. 그 정도는 국회의원들을 믿어도 된다고 본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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