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엿보기 기술

  • 입력 1999년 10월 7일 18시 41분


신창원처럼 변장술이 뛰어난 범인들이 마음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얼굴로 신원을 확인하는 컴퓨터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영국 런던 교외의 한 거리에 설치된 얼굴 인식 시스템은 모자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의 신원을 밝혀냈다. 세계 최초로 거리에서 시험 운용된 얼굴 인식 장치인데 날마다 1분도 쉼없이 비디오 카메라로 모든 행인의 얼굴을 주사(走査)하여 컴퓨터로 즉시 지명 수배자들의 얼굴과 대조한다. 만일 범인으로 판명되면 관제실에 경보가 울리고 근무자는 재확인을 한 뒤 경찰에 통보한다.

이러한 기술은 생체측정학(Biometrics)의 산물이다. 생체측정 시스템은 사람의 생리적 특성과 행동적 특성으로 신원을 확인한다.

생리적 특성은 얼굴을 포함해 지문, 손의 윤곽, 눈의 홍채구조가 이용된다. 필적, 음성 등 행동적 특성을 응용한 제품은 은행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얼굴 인식 기술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범인, 마약 밀매자 또는 테러리스트를 찾아내는 기능이 단연 뛰어나므로 감시 수단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가령 지난 여름 영국의 몇몇 백화점에서 들치기들의 얼굴을 추적하는 시스템을 가동했으며 세계 유수의 공항에서는 얼굴 인식 시스템을 비밀리에 시험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얼굴 인식 시스템이 거리나 공항 등 공공장소에 설치되면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일반 시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

비디오 카메라로 엿보는 기술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여자 화장실을 훔쳐보는 몰래 카메라부터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유선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엿보기 기술은 프라이버시를 넘어 인권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몰래 카메라는 관음증(觀淫症)을 충족하는 개인적 일탈(逸脫)행위로 보아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사업장에 상비(常備)된 감시 카메라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농후하다. 이를테면 작년 미국에서 화장실 감시 시스템이 출현하여 근로자 권익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카메라와 특수 전자 장비를 설치하여 직원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부러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는지,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어놓은 채 담배를 피우며 빈둥거리는지를 알아낼 계획이었다. 가장 사사로운 공간인 화장실에까지 감시의 눈길이 뻗치게 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노동 현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업주들은 기사의 요금 횡령을 막는다는 핑계로 운전석 위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대부분의 공장은 유선 텔레비전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근로자들의 기숙사 목욕탕 탈의실에 도난 방지를 명분으로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엿보기 기술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연상시킨다. 독재자 빅 브러더는 텔레스크린으로 모든 국민의 사생활을 끊임없이 엿본다. 얼굴 인식 시스템은 영국에서 효력이 입증되면 세계 대도시의 거리에 설치될 터이다. 길을 걸으면서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하는 시대가 임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빅 브러더를 견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해 엿보기 기술을 보유한 국가 기관을 어떻게 감시해야 할 것인가.

이런 맥락에서 수사기관의 불법 엿듣기에 대한 이번 국정감사 결과가 주목된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