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 출생과 성장]이스트만 코닥

  • 입력 1999년 9월 28일 18시 49분


필름 제조업체로 유명한 이스트만 코닥의 역사는 호기심 많은 한 사진 애호가의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시작됐다.

1878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은행 서기였던 조지 이스트만은 휴가 계획을 세우면서 휴가 기간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자고 동료들과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내 포기해야 했다.

전자레인지 크기의 카메라와 삼각대, 각종 화공약품과 유리판 등 사진 촬영에 필요한 장비를 옮기기 위해서는 ‘당나귀라도 동원해야할 판’이었기 때문.

▼불편한 장비 개량하려 연구▼

이 때부터 그는 보다 간편하게 사진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실험에 몰두했다. 체계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영국에서 펴낸 사진 관련 잡지 뿐이었다.

3년간의 실험 끝에 이스트만은 필름의 초창기 형태인 건판(乾板)과 이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사업가 헨리 스트롱과 손을 잡으면서 그의 발명품은 상용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는 승승장구. 1883년 젤라틴 코팅된 종이를 롤에 감은 새로운 형식의 감광필름 개발, 1888년 최초의 휴대용 카메라 시판 등….

1912년 코닥은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연구소를 세우고 영국의 사진학자 케네스 미스박사를 소장으로 영입하면서 또 한 차례 도약을 맞는다.

▼뛰어난 종업원 복지 명성▼

코닥의 성장에는 종업원에 대한 창업자의 남다른 배려도 큰 몫을 했다. 이스트만은 창업 초기 종업원을 정당하게 대우하며 이윤은 사업확대에 재투자한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경영 이념을 세웠다. 현재 코닥의 종업원 복지안내 팜플렛은 무려 245페이지에 달할 정도.

일생 동안 사진기술 개발과 종업원들의 복지 향상, 회사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신념을 지킨 이스트만은 매우 독특한 죽음을 선택했다. 77세때인 1932년 권총으로 자살한 것.

그는 “친구여 나의 일은 모두 끝났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는 말을 유언장에 남겼다. 그리고 전 재산을 로체스터 대학에 기부했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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