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규철/'도덕전쟁'

  • 입력 1999년 9월 21일 18시 45분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은 일요일에 교회 앞에서 목사와 악수하는 사진을 찍곤 한다. 그런데 이번엔 의례적으로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때보다 경건한 후보들의 ‘신앙서약’이 잇따르고 있다. 역사학자나 정치분석가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한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텍사스주지사는 휴스턴의 교회에서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맡긴다는 결심을 밝혔고 민주당의 앨 고어부통령은 흑인침례교대회에 참석해 자신을 천년왕국의 아들이며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공화당의 엘리자베스 돌 전미국적십자사총재는 필라델피아의 조찬기도회에서 신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들은 왜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섰는가.” 미국정가의 움직임을 전하는 최근 뉴욕타임스기사의 일부다.

▼ 美선거 큰쟁점 부각

빌 클린턴대통령이 ‘르윈스키스캔들’을 빚었을 때 미국민의 60%가 그것은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대통령직을 떠나야 할 사유는 못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됐을 때도 여론은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미국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개탄의 소리가 컸다. 클린턴대통령으로 대변되는 베이비붐세대가 앞장서서 경제전쟁에서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문화전쟁에서는 패했다는 진단도 나왔다. 그에 대한 반작용일까. 지금 미국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후보들이 들고 나선 신앙 깃발은 유권자를 향한 ‘도덕성 선언’이다. “대통령에 당선돼 백악관에 들어가서 절대로 부도덕한 짓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후보들은 많은 미국민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최근 CNN과 갤럽 여론조사에서 ‘당신의 걱정거리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58%의 미국인이 도덕문제를 지적했다. 경제문제라고 응답한 사람은 38%였다.

도덕문제가 갑자기 부각되고 있는 배경엔 스캔들 외에 또다른 요인이 있다. 올들어 콜로라도주 컬럼바인고교 등지에서 잇달아 벌어지고 있는 무차별 총격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공포감이다. 학생이 학교에서, 시민이 직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총에 맞아 죽어야하는 불안감은 ‘미국문화’에 대한 회의론으로까지 이어졌다. 미국사회를 지탱해온 가정 학교 교회 지역사회의 도덕적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크다. 이제 미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치르면서 도덕성 회복과 미국문화 살리기운동에도 나섰다. 그 선봉에 언론이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직성 시민의식 성실성 그리고 개인적 책임감에 대한 가치를 소홀히 했다”는 자성(自省)이 강하게 일고 있다고 연일 언론은 전한다. 그래서 구체적 방법으로 ‘도덕적 리더십’이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내년 11월7일 대통령 주지사 상하원 의원을 뽑는 총선거에서 ‘도덕전쟁’도 함께 치르게 되는 셈이다. 정치 경제 군사 첨단기술부문에서 ‘세계 제일’을 자임하는 미국민은 왜 이제 와서 도덕운동을 벌이는가. 풍요로운 사회라 하더라도 도덕이 무너질 때 덮쳐오는 황량감을 견딜 수 없어서 인가.

▼한국정계도 반문을

미국정치는 민주 공화 양당제가 확립되면서 ‘진보적 민주당’ ‘보수적 공화당’이란 특색 있는 정책을 유지해 왔으나 요즈음 양당간 구별이 없어지는 정책적 월경(越境)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공화당후보경쟁에 나선 부시주지사, 존 매케인 애리조나상원의원, 엘리자베스 돌여사는 최근 동성연애자들에 대해 신중한 포용의사를 밝혔다. 매케인은 또 공화당의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낙태를 합법이라고 한 최근의 대법원 판결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양당간의 정책차별성이 모호해지는 현상도 ‘도덕적 리더십’이란 선택기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공화당이 민주당보다는 개인적 책임감, 윤리, 신앙심 등을 잘 대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지만 미국의 유권자들은 이제 양당을 구별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전체가 하나가 돼 문제해결을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양당정책에서 차별성이 없어지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찌 보면 앞으로 정당정치의 진로에 중요한 전환점을 예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년 4월 새 밀레니엄의 첫 총선을 치른다. 한국정치는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일상생활은 안전한가. 또 정치인들의 도덕적 리더십은 어떤가. “뭘 새삼스레 묻느냐”고 할지 모른다. 우리라고 ‘도덕전쟁’을 못치를 이유가 없다.

최규철<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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