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인길/聖君 신드롬

  • 입력 1999년 9월 8일 19시 24분


지금 항간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다. 하도 요상한 것들이 많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무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재벌과 개혁에 관한 것들도 있고 검찰과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관한 것들도 있다.

‘이익치는 희생양이야’ ‘현대사건은 재벌 길들이기야’ ‘대우 다음은 현대고 그 다음은 삼성이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지만 개중에는 일그러진 세태를 꼬집고 비웃는 섬뜩한 것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른바 ‘성군(聖君)신드롬’이 아닌가 싶다. 성군이 상징하는 의미는 짐작컨대 절대적인 권위와 탁월한 치적일 것이고 거기에 신드롬이라는 별로 기분 좋지 않은 단어가 붙어 ‘동종의 증상’을 총칭하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말하자면 ‘다 잘되고 있다’는 독선적 인식과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가 특정인의 생각과 말에 따라 한쪽으로 쏠리는 시류(時流)를 빗댄 ‘풍문’인 셈이다.

실체적 현실을 왜곡하는 소문과 풍문을 놓고 맞장구를 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금융계를 한바탕 소란스럽게 했던 대한생명 처리과정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공룡부처 금융감독위원회의 막강한 권한을 생각할 때 법원이 금감위에 패소판결을 내리며 재확인한 ‘행정행위의 절차적 적법성’은 법치(法治)주의의 관점에서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금감위측은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개법)상 행정처분은 행정절차법상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강변했지만 법원은 ‘헌법 내지 법률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못박았다.

이 말을 거꾸로 풀어보면 그동안 금감위가 법절차를 무시하고 ‘부실’이란 이름 하에 기업의 생사여탈을 마구잡이로 좌지우지 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훗날 분쟁과 논란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법원판결이 있은 후 금감위가 취한 후속조치는 더 한심하다. 금감위측은 ‘행정처분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며 후속절차 진행에 들어가 있지만 이번 소송은 행정처분의 적법성을 따지는 재판이 아니었다. 여기서도 금감위측은 자신에 유리하게 아전인수식으로 판결내용을 해석하고 있다.

치밀하지 못한 사전준비와 자신의 엉성한 법적대응은 반성하지 않고 ‘여의치 않으면 퇴출시키겠다’며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은 후안무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현대전자의 주가조작 사건에서 조작주체가 뒤바뀐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이익치회장을 조작주범으로 단정한 검찰수사가 옳다면 금감위는 완전히 엉터리 조사를 한 결과가 된다. 그러면서도 ‘조사요원이 모자라서’라며 어물어물 넘어가니까 ‘누가 누구를 봐줬네’ 어쩌네 하는 이상한 소문이 생겨나고 정부의 권위와 신뢰에 금이 가는 것이다.

경제정책의 구심축(求心軸)이 흔들리는 것도 큰 문제다. 불과 보름 전 당정협의를 거쳐 국민앞에 발표한 ‘과세특례제 폐지’ 방침을 내년 총선을 의식해 손바닥 뒤집듯 백지화한 것은 정치가 경제논리를 압도한 선심정책의 전형적 예다.

8·15경축사에서 보았듯이 대통령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온 경제부처가 정책개발에 난리를 치고 장관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젠 진부하다.

정치쪽은 한술 더 떠 보스의 독단적인 판단 때문에 ‘다 알면서도’ 밀려가는 분위기가 더 심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누구도 거역 못하는 절대적인 재벌의 황제경영도 이런 퇴영문화의 아류에 다름아니다. 우리사회 도처에서 횡행하는 ‘성군신드롬’을 경계한다.

이인길<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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