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1)

  • 입력 1999년 8월 22일 19시 00분


살결이 가무잡잡하고 얼굴이 동그랗고 눈썹이 짙은데 눈은 크고 까맣고 장난스럽게 반짝인다. 어딘가 태평양이나 남방 어느 곳 처녀 같다. 나는 그네가 이 집 주인인 나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미소로 응답했다. 그 대신에 송영태를 향하여 그네의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청소를 해주신 범인이 여기 최형인 모양이지?

예, 지가 건성건성 꽁초 줍고 마 빗자루질만 하고 재떨이 비우고 안했습니까. 저 그라구요, 냄비에 물 쫌 올레 놓을라카는데요?

뭐 차 마시게?

아니라예, 사실은 저녁을 걸렀거든예. 그래서 라면 좀 끓일라꼬 하는데….

나는 그제서야 비닐 봉지 생각이 나서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달걀 두어 개, 마른 안주 몇 봉, 소주 사홉들이 두 병에 종이컵 서너 개, 매운 라면이…다섯 개. 그네가 비닐 봉지를 탁 채뜨려 갔다. 나는 좀 멋쩍어져서 그네에게 말했다.

내가 끓여 줄까요?

마 괘안타면 지가 해볼라꼬요. 자취에 도가 터서 라면의 가장 맛있는 순간 포착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솜씨라예. 영태 형 몇 번을 원해?

난 일번두 감지덕지야.

자아 일번은 그냥 맹물 넣고 끓이는 라면, 이번은 라면에 계란을 넣고요, 그리고 삼번은 파를 송송 썰어 넣는 거라예.

송영태는 아까부터 최미경에게 말을 시키는 게 재미있어 죽겠는지 히죽이 웃으며 그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앉았는 눈치였다.

그럼 그 담은 뭐야, 계속해야지.

헷갈리게 하지 마이소. 다음이 아니라 특번이락꼬요, 네에, 약간의 신김치를 송송 썰어 넣습니데이.

젠장할 침 고이네. 리론이 아니라 료리를 얼른 해와야지.

내가 일어서려 하니까 송영태가 팔을 잡으며 눈짓을 해보였다.

놔둬 봐.

냉장고에서 김치 꺼내 주려구….

아까 다 파악하는 거 같든데?

언제?

윤희 잠자는 사이에.

세상에, 거침없기란 송보다 더하구나. 나는 어쨌든 그 아이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하고 선머슴같이 쾌활하고 솔직해서 처음부터 호감이 갔었다. 최미경이 부엌 공간에서 서성대는 사이에 나는 송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야?

어 열두시 다 됐는걸.

쟨 집두 없나? 부모님이 야단 안 쳐?

서울엔 없지. 부산 애니까.

도대체 요즘 애들은 나일 알 수가 없어. 여고생이나 재수생 같기두 하구. 옷 갈아입히면 아줌마로 변하기두 하니 말야.

쟤 몇학년이드라…어이 최미경 너 몇 학년이냐?

삼학년. 일년 재수했심더.

너 법대 맞지?

남사스럽게 그건 왜 들쳐내고 그라는교.

아무래도 내가 도와 줘야 할 것 같아서 일어나 그릇도 꺼내고 김치며 마늘쫑이며 밑반찬도 꺼냈다. 우리는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그네가 배식을 자청했다.

나는 얌전하게 빈 그릇을 들고 그네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나두 좀 출출한 판이었어.

야참에 쐬주라…이거 죽여 주는구먼. 밖엔 가을비가 내린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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