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재벌개혁 이번엔 제대로

  • 입력 1999년 8월 16일 18시 39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대선 공약을 방불케하는 국정 운영방향을 제시하면서 강도높은 재벌개혁을 천명했다. 김대통령은 실질적인 재벌해체 정책을 시사했으며 구체적으로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의 해소, 재무구조의 개선 등 재벌개혁 5대 원칙을 금년 말까지 마무리짓고 나아가 계열 금융회사를 통한 재벌의 금융지배를 막을 것이며 순환출자와 부당 내부거래, 변칙상속 또한 철저히 막겠다고 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며 흠잡을 데 없이 옳은 정책방향이다.

그러나 그 정책의 실천에서 우려되는 몇가지 사항을 당국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뜻에서 지적해 두고자 한다. 재벌개혁은 새로운 정책은 아니다.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이미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주요 과제로 재벌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부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정부자료에 의하면 지난 1년 동안 30대 재벌의 출자총액은 68.9%나 증가했고 내부 지분은 44.5%에서 50.5%로 늘어났다. 5대 재벌은 그 정도가 심해서 출자총액이 무려 94.3%나 증가했다. 외국인의 적대적 기업인수 합병을 우려해 시행된 출자총액 제한 제도의 폐지는 재벌 총수의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원군이 되었으며 탈법적 증여와 편법 상속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계열 금융회사들은 이미 재벌의 사금고 노릇을 하고 있고 이들의 활약으로 자금시장은 재벌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다. 정부가 연말까지로 시한을 못박고 있는 부채비율의 축소도 재벌들은 상당부분 자본의 실질적인 투입없이 계열사간 순환출자와 자산재평가로 해결을 도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지난 1년여 동안 재벌개혁을 한 것이 아니라 재벌개악을 해온 셈이다.

향후의 재벌개혁이 이런 식으로 추진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30여년간 우리 정부는 국민 의사와는 상관없이 재벌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재벌의 역할이 막중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분배과정에서 그 피해 또한 컸음을 우리 국민은 잘 알고 있다. 또한 재벌은 그 소유 및 지배구조, 부(富)축적 과정의 비정당성과 정경유착 등 문제로 국민의 뇌리에 부정적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 재벌이 형성된 이후 모든 정권이 재벌개혁을 시도했으나 한결같이 실패했다. 오히려 재벌로부터 ‘정치는 3류’라는 질책을 받기도 했으며 그런 정부를 개혁하겠다고 정권장악에 직접 나섰던 재벌마저 있었다. 김대통령이 결심한 것처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되기가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재벌은 개발 연대의 역할을 딛고 일어서서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재벌개혁은 재벌이 사는 길이며 나아가서 국가경제가 사는 길이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된다.

재벌개혁은 정부의 규제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으며 기업의 능동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다. 정부가 재벌개혁을 강압적 수단으로만 추진해 나간다면 재벌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여 시기를 놓칠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재벌개혁은 물론 경제의 회생 노력마저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재벌개혁이 재벌말살 정책이 아니라 재벌살리기 정책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기업의 활동의욕을 자극하고 자발적 협력을 촉구해 나가야 하다.

또한 재벌개혁이 미운 재벌 죽이기나 특정 재벌 봐주기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된다. 과거 정권들의 재벌개혁은 노골적으로 그러한 인상과 흔적을 남겨서 개혁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키지 못했고 그 결과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투명하고 공정한 세부 개혁정책을 수립해 실천해 나가야 하며 어떠한 정치 논리로도 개혁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재벌개혁은 주도세력의 확고한 의지와 일관성 있는 실천만이 성공을 보장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을 주도해나갈 공공부문의 개혁이나 정치분야의 개혁이 미진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재벌개혁은 화려한 구호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예종석(한양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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