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원일/월북자 가족에도 혈육상봉 기회를

  • 입력 1999년 7월 11일 20시 11분


본격적인 무더위가 닥친 휴가철이다. 한 달 살기가 팍팍한 이 나라 서민들은 아직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후유증을 앓으며 바캉스는 고사하고 집에서 선풍기나 틀어놓고 수박통이나 쪼갤 수밖에 없다. 퇴출당한 가장을 둔 가정이나 영세민의 여름나기는 처지가 더욱 딱하다. 던져지는 신문에 변칙 주식 양도를 통한 재벌 기업들의 부(富) 세습과정을 지켜보며 정권조차 바뀌는데 영영세세 기득권을 누리겠다는 자들의 행복을 생각하면 그나마 살맛이 없다. 아홉을 가진 자들이 하나를 가진 자의 하나마저 빼앗겠다는 현실에 분통이 터진다. 주식이 네자릿수를 돌파했다고 ‘방방 뛰는’ 것도 돈푼이나 있는 자의 노래다. 그나마 이 폭염에도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을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생각하면 이쪽 처지가 그래도 숨 쉴만하다는데 상대적인 위로를 받는다.

◆이산가족 범주서 제외◆

베이징(北京) 남북 차관회담 전, 가을까지는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정부의 낙관론을 들을 때만 해도 폭염을 넘겨 추석이면 어찌 길이 뚫리겠거니 하고 실향민의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나 북한은 비료만 챙기고 협상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태껏 당했으면서도 북한이 어떤 집단인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실향민을 더이상 울리지 말라는 당연한 성토가 뒤따랐다. 그만큼 이산가족 상봉문제는 남한 정부의 곡진한 포용론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까지는 현실적으로 첩첩한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통일조국을 향한 고착된 분단 매듭을 어떡하든 풀어보겠다는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아래,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문제의 숙원사업으로 꼽았다. 전쟁으로 가족이 헤어진 채 50년 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국가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가. 1000만 이산가족의 한은 이번 정부가 꼭 풀어주어야 한다는데 국민의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1차 생사 확인을 위한 편지 왕래, 2차 판문점이나 나진 선봉지구에 면회소를 설치하여 지속적인 가족 상봉, 3차 이산가족 남북한 자유왕래란 장기적 포석 역시 타당성이 있는 제안이다.

이 시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우리의 자세가 얼마만큼 진취적이었나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태껏 혈육의 만남은 동질감의 민족정서로 풀고, 이념의 벽은 그대로 고수한다는 원칙에 충실해왔다. 북한이 이산가족의 일원으로 줄기차게 귀환을 요구하는 장기수 문제의 처리가 그렇다.

◆우리가 먼저 베풀자◆

6·25 전쟁 전후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또는 전쟁 와중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풍문에 겁먹고 남으로 피란나온 실향민의 가족 생사 확인과 고향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통일부는 이산가족의 면회와 방북신청을 받아왔다. 그렇게 남한으로 내려온 이산가족이 있는 반면에 6·25 전후 북한의 체제를 선호하여 월북의 길을 택한 이산가족도 있다. 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이 고착되었을 때 남한에는 인민의용군이나 노력동원에 자의든 타의든 징집되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후퇴하던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숫자 또한 적지 않다. 남한에 남겨진 그들의 가족이야말로 ‘반공’의 족쇄에 묶여 오늘날까지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살아왔다.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통해 이념의 낡은 고리를 순차적으로 깨겠다면, 월북자의 남한가족 면회나 방문도 이산가족 상봉에 포함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또한 월남한 이산가족의 면회나 방북신청처럼, 남한의 월북자 이산가족도 북한에 있는 혈육을 면회하거나 초청신청을 받아주어야 하고 남한에 체류하는 장기수의 북한 가족 상봉도 주선해 주어야만 상호호혜의 원칙에 맞을 것이다.

장거리 대공포 생산에만 주력하는 북한을 두고 정부가 여태껏 노력한 포용정책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멀리 내다보고 인내하며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받을 것을 예상하지 않고 주는 사랑은 아름답다. 무더위 속에 가진 자의 자비를 다시 생각해본다.

김원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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