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17)

  • 입력 1999년 5월 16일 20시 04분


아아 시원하다.

내가 바위 위에 앉으면서 중얼거렸지만 당신은 아무 말없이 내다보기만 했죠.

나는 쌕에서 물병을 꺼내어 마시고 당신에게 넘겨주면서 말했어요.

아이 배고파. 아침 먹은 거 다 내려갔어. 우리 김밥 먹자.

그런데도 당신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멍하니 먼 곳을 보고 있다가 나에게 문득 물었습니다.

오늘이 며칠이야?

오 월 이십칠 일 수요일. 일 학년 세 시간 이 학년 두 시간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미술 시간 수업 말예요. 오늘 빼먹었으니까 지금쯤 자습하구 있겠지.

그랬더니 당신은 내쪽은 건너다 보지도 않고 말했어요.

오늘이 작년 그 날이야. 도청에서 마지막 학살이 있던….

그때에 당신의 젊은 벗들은 상무대 영창을 떠나 감옥으로 옮겨져 날마다 철창을 차며 노래를 부르고 단식을 하고 그랬다지요. 죽은 이들은 아직 무덤조차 제대로 쓸 수 없었구요. 그렇지만 이런 때 그 이야기를 꺼낼 건 뭐람. 나는 당신의 우울한 기분을 날려 주노라고 무심코 한마디했어요.

우리 오늘 제사 지내요.

그래, 오늘 저녁에….

나는 사실 몹시 불안했어요. 당신이 저 허공 너머에 있는 세상으로 한눈을 판다는 느낌 때문에요. 우리는 김밥을 먹었지요. 정말 옛날 소풍 갔던 생각이 났어요. 당신은 훨씬 기분이 나아져 있는 것처럼 보였죠.

우리는 그날 저녁에 제사를 지내기로 해서 내가 읍내로 나가 과일하구 생선이며 쇠고기를 조금 사왔어요. 그리고 절편하구 팥시루떡두 몇 장 샀어요. 아니 제사 핑계 대고 우리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준비했던 거예요. 나는 음식을 장만했고 당신은 방 안에서 상을 차렸지요. 상 머리에 촛불을 켜고 향도 없이 그냥 소주 병 올려 두고 주발 뚜껑에 술 따라 놓고 당신과 나는 무릎을 꿇고서 나란히 앉아 있었답니다. 나는 어쩐지 조금 쑥스러웠지요. 당신의 진지한 침묵이 어색하기도 했구요. 그러나 솔직히 내 기분을 말하란다면 당신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드리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의 도피를 도와 주고 있었을 뿐 무슨 엽기적인 줄거리에 나오듯이 당신이 나의 포로는 아니었잖아요. 한데 그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더군요. 당신이 종이 쪽지를 꺼내더니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어요.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로 시작되는 긴 문장들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나요. 그렇지만 나중에 새로운 세상을 기원하던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기억하구 있답니다. 눈 들어 바라보면 꽃 핀 강산은 하나인데 당신들은 어떤 세상을 그리다 가셨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어디서나 그런 유인물 조각들이 손에서 손으로 흘러 다녔는데 대부분 어딘가 상투적이었지요. 그런데도 가슴이 저려 오고 피가 뜨거워지는 듯했어요. 좌경이라는 말이 왼쪽으로 기울었다는 말일텐데 당신과 당신의 벗들이 책을 읽고 저쪽 생각에 대해서 학습하기 시작한 건 학살 이후부터였어요. 여긴 우리의 고향이 아니게 된 거였지요. 고전적인 혁명의 세기가 다 지나갔는데도. 그렇지만 생각은 다시 새로워지고 세상이 지어 놓은 꼴만큼 앞으로 나갈테니까 나는 당신의 선택을 말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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