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14세 소녀의 유서

  • 입력 1999년 4월 18일 19시 51분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장사 나간 홀어머니를 기다리던 진영숙양(당시 서울 한성여중 2년)은 이런 편지를 남겨놓고 거리로 뛰쳐나가 데모대에 합류했고 끝내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는 그 내용처럼 유서가 되고 말았다. 39년 전 오늘, 오후 8시경이었다. 그날 전국에서 1백86명이 진양처럼 목숨을 잃었고 혁명은 이루어졌다.

▽열네살짜리 소녀, 요즘같으면 H.O.T나 젝스키스에 열광하고 또래들과 패스트푸드점에서 피자와 콜라를 즐길 어린 소녀를 그렇게 거리로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록 고귀한 희생이라 기록된들 봄꽃같은 어린 생명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탐욕스러운 권력과 썩은 정치가 빚어낸 ‘미친 바람’이 아니던가.

▽거창한 얘기같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고 존엄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우주와 존재를 억압하고 위해하는 권력과 불의에 저항한다. 그것이 때로는 시대정신이 되어 변혁과 혁명을 부르고, 때로는 좌절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그 갈등을 지혜롭게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정치의 몫이다.

▽39년 전 오늘, 열네살 어린 나이로 숨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쉰셋 초로(初老)의 여인이 되었을 한 영혼은 여전히 지역과 정파성에 매달린 채 갈등과 반목을 부추기고 있는 오늘의 정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39주년을 맞는 4·19 아침에 떠올려 보는 단상이다.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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