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심리학]입술의 상징

  • 입력 1999년 4월 4일 20시 08분


물결치는 천 위에 둥둥 떠있는 분홍색 입술이 실로 얼기설기 꿰매져 있는 그림. 스페인 감독 루이 브뉘엘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포스터에 나오는 그림이다.

실로 꿰매진 이 입술은 수많은 매듭으로 묶여져 풀기 어려운 여자 주인공의 팬티를 의미한다는 설명이 관객에게 나눠주는 전단에 나와 있다. 과연 그럴까. 포스터를 90도만 돌려서 옆으로 세워보자. 무엇이 보이게 되는지.

여성의 성기처럼 상징으로 자주 쓰이면서도 실생활에서는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귀여운 여자 탤런트가 과자를 들고 “내껀 촉촉해”라며 미소짓는 광고에서부터 교묘하게도 초콜렛의 윗부분을 여성의 그것과 비슷하게 말아올린 뒤 ‘맛있다’는 표현이 큼지막하게 나오는 케이크 광고까지. 모르고 지나가면 그 뿐이지만 식품 광고에서 자주 나타나는 성욕과 식욕의 결합을 노린 시도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루이 브뉘엘 감독은 그런 종류의 상업적인 광고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사망하기까지 숱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이 괴짜 감독은 일찍이 현대인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상징들로 가득찬 ‘안달루시아의 개’나 인간의 탐욕을 비웃는 ‘비리디아나’‘세브린느’등의 문제작을 만들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입술을 꿰맨 실은 정조대를 의미한다. 브뉘엘은 성을 무기로 남자를 조정하려는 여자의 욕망, 그리고 돈으로 여성을 사려는 남성의 부르주아적인 속물근성을 통렬하게 비꼰 것이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인간’에도 세로로 놓여 있는 입술의 클로즈업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 때의 입술은 아이가 나오는 장면과 연결되면서 여성의 출산을 의미했다. 또 베르히만 자신의 영화적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이렇듯 영화속의 어떤 상징도 고정된 의미를 가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며 감독의 의도이다.

상징이나 연상을 통해 은밀한 권유를 하는 대신 통렬한 풍자를 가해 예술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화감독의 특권이기도 하다.

심영섭(영화평론가·임상심리전문가)kss1966@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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