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 입력 1999년 3월 30일 19시 11분


‘어린 것’들이 지금처럼 말썽을 피운 적은 없었다. 부모가 큰 마음먹고 사놓은 비디오카메라로 ‘빨간 마후라’를 찍더니, 하도 졸라대는 통에 사준 휴대전화로는 체벌 교사를 112로 경찰에 신고해 파문을 일으켰다. 담임교사를 불신임투표에 부치는가 하면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흡연 음주 폭력은 이젠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한다. 또 언제 어떻게 어른들의 뒤통수를 때릴지 겁이 날 지경이다.

▼말썽많은 무서운 10대▼

얼마전 일부 국회의원들이 교육현장에서 사실상 금지해온 체벌을 허용하자는 법안을 내놓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어른이고 스승이고 도대체 위 아래가 없는 아이들을 바로잡기 위해 최후수단으로 회초리를 드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이들 문제가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학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교육당국은 입시제도가 잘못돼서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대입 무시험전형의 당위성을 부르짖고 있고 교사들은 정부가 교권을 뿌리부터 흔들어 교육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외친다. 어쩔 수 없는 세태변화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것하나 딱 들어맞는 정답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늘 뒷전에 밀리는 것이 있다. 당사자인 학생들의 입장이다. 교육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얘기를 들으나 안들으나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어른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듯하다.

청소년과 관련해 기성세대는 여러 각도의 반응을 보인다. 그중 한 부류는 ‘너희들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느냐’는 식으로 이들을 과거 방식대로 밀어붙이려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는 청소년 문제가 어찌됐든 상관하지 않고 이들의 ‘탁월한’ 구매력을 이용해 돈을 챙기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원하는 물건이라면 유해하더라도 무조건 팔아 한몫을 잡는데 혈안이 된 부류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건전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교육현장은 몇년 사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가 들이닥친 이후 학부모들의 의식이 크게 달라졌다. 아이들을 맡겨놓고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이런 저런 학교비리를 못본 척 해온 학부모들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태도의 변화를 보인 것이다. 촌지 수수에 대한 비난여론이 급등하고 급기야 교사 자질에 대한 문제로까지 확산됐다. 이는 교사, 나아가 스승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처럼 아이들이 무조건 선생님에게 복종하는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교육현장의 변화와 함께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세대차가 요즘처럼 부각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80년대 경제성장의 혜택과 핵가족 시대의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으며 TV 인터넷 등 새로운 영상 통신매체에 익숙한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부모나 교사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이들이 ‘특별한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청소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무엇보다 이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들을 모르고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때론 이들의 입장에 서서 눈높이를 낮추는 일도 필요하다.

교사폭행 문제만 해도 기성세대는 아이들이 스승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렀다고 한탄만 했지, 여러 급우들 앞에서 매를 맞은 아이들의 수치심과 모멸감, 나아가 과잉체벌에 따른 인권 문제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눈높이 맞춰 이해해야▼

‘왕따’가 나쁘다고 큰소리로 야단치기는 했어도 ‘왕따’가 왜 일어나는지 함께 고민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이들이 왜 일본 대중문화에 빠지는지, 이들이 열광하는 ‘파이널 판타지’나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한번쯤 구경해본 적이 있는가.

이들은 미래의 덕목인 창의성과 다양성 면에서 어른들을 훨씬 능가한다. 여러 채널을 통해 외국 문화를 빠르게 접하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나다. 21세기를 살아갈 주역인 이들을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잣대와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어쩌면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 어른들은 이들을 ‘어제의 방법’이 아닌 ‘미래의 방법’으로 이끌어 나갈 책임을 지니고 있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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