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권재현/팽개쳐진 「민족의 성지」

  • 입력 1999년 3월 1일 20시 27분


“청년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 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1967년 탑골공원에 세워진 3·1정신찬양비의 글귀다. 그러나 월탄 박종화선생의 이 글귀는 1년중 어쩌면 3월1일 하루에만 해당하는 글귀일지도 모른다. 평소 민족의 성지라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은 카세트라디오에서 뿜어나오는 ‘뽕짝’음악이요, 눈에 띄는 것은 어지러이 춤을 추거나 술기운에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모습들이다.

특히 독립선언서를 새겨놓은 3·1독립기념탑 자리는 주흥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 이 때문에 평소 그 앞에는 ‘이 위에서는 술을 드시지 마시오’라는 글귀가 볼썽사납게 붙어있다. 북문과 서문앞에 붙어있는 ‘소변금지’라는 글귀는 차라리 영어번역문이 붙어있지 않는게 다행.

물론 탑골공원은 오갈 데 없는 노인들과 실직노숙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넉넉한 공간이기도 하다.

외국인관광객들조차 탑골공원을 찾는 것은 3·1독립정신의 현장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노인들이 모여 ‘동양 체스(장기)’를 두거나 점을 봐주는 ‘흥미로운 공간’이라는 관광안내문 때문이다.

“공원 정문앞에 작은 팜플렛이라도 비치해두고 기념물앞에 잔잔한 음악이라도 틀어준다면 어떨까요.”

탑골공원이 민족의 성지라는 말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던 영국인 관광객 아인 브라운(22)이 한참 후 던진 조언의 말이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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