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화해의 미학

  • 입력 1999년 3월 1일 20시 04분


▽화해란 갈등과 적대감을 전제로 존재하는 용어다. 어떻게 싸웠느냐가 그후 화해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가간에는 휴전협정과정에서 진정한 화해 없이도 공존이 가능하다. 6·25후 한국 미국과 북한 중국이 그랬다. 국가간에는 경계선이 있어서 국제법적 합의문서만 만들어 내면 된다. 그러나 같은 국민으로 감정의 응어리를 안고 있으면서 진정한 화해 없이 살아가기는 어렵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사망자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1일 당시 진압부대인 3공수여단을 방문해 화해행사를 가졌다. 5·18 피해자들이 진압부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들이 그동안 정부청사나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농성을 한 일은 많았다. 진압부대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층부의 명령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군부대가 벌인 과잉진압도 문제였다.

▽서울에 주둔하는 3공수는 시위진압부대 중 최정예로 시민저항이 심각해진 80년 5월20일 아침 광주에 투입됐다. 먼저 도착한 7,11공수와 20사단 병력이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날부터 광주에서는 시민과 진압부대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진다. 최초의 총성이 20일 밤 11시경 광주신역에서 터졌다. 27일 새벽 전남도청의 시민항쟁 본부를 공격한 선봉역도 3공수 특공조가 했다.

▽광주시민에게 3공수는 그래서 ‘유명한’ 부대다. 5·18피해자들이 그 부대에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부모형제에게 발포한 부대와 악수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킹 목사의 64년 노벨평화상 수상연설 중 “갈등 해결에서 보복과 침략을 거부하는 방법을 발전시키자”고 한 대목이 되새겨진다. 광주 피해자들의 진압부대 방문이 화해의 미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