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

  • 입력 1999년 2월 3일 19시 05분


큰 길에서 버스가 산줄기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한쪽으로는 제법 깊은 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산 위에서 녹아내린 물이 개천이 되어 드문드문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 내려갔다. 낮은 언덕 위마다 농가가 한 두 채씩 보였고 가지런하게 전정한 키 작은 과목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읍의 번성은 이 고장이 도에서 가장 많은 과수원을 가지고 있어서인 듯했다. 계곡 양편에는 좁다란 논이 계단식으로 층층이 보였고 개천 가에 작년 가을 피어났던 억새가 하얀 술을 그대로 매달고 바람에 흔들렸다. 윤희와 나는 계곡 위에 시멘트 다리가 놓인 곳에서 내렸다. 버스는 우리를 다리 앞에 남겨두고 털털거리며 멀어져 갔다.

다리를 건너서 산굽이를 돌아 나가자마자 두 산자락 사이에 가려있던 시야가 한꺼번에 확 트였다. 마치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양편으로 벌리고 앉아 있는 것 같은 둥그런 산이 정면에 보였고 그 남향받이에 집 몇채가 띄엄 띄엄 안겨 있었다. 길의 바깥 쪽에서는 다리 건너 비좁은 산길 안에 이런 동네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앞의 완만한 경사지에 과수원이 보였다. 계곡의 지류인 개천이 산에서 천천히 흘러 내려오고 개천가에는 초가로 지붕을 이은 물레방아간도 있고 과수원 너머 뒤편에는 짙푸른 대 숲이 있었다. 이제 막 봄의 문턱이라 포근하고 흙냄새 풍기는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까치 한쌍이 말라붙은 열매 몇 개를 매단 가지뿐인 감나무 끝을 오르내리며 쾌활하게 우짖었다. 윤희는 바람의 맛을 보려는 것처럼 흐음, 하고 깊은 숨을 들여 마시더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여기가 갈뫼예요.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간다. 십 팔년 전 태풍이 몰아치던 날 밤에 나는 서울로 떠났다. 윤희는 그 다리 앞에까지 우산을 받쳐들고 따라왔다. 그네의 시골 아낙같은 꽃무늬 치마는 비에 젖었고 코가 오똑한 고무신은 자꾸 벗겨졌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 버스의 앞등 불빛이 나타나고 무슨 맹수의 눈같은 빛이 차츰 커지면서 땅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들이 반짝였다. 멈춰선 버스에 오르기 전에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윤희는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이 보였다가 팔꿈치는 굽힌 채로 한 손을 들어 손목만 희미하게 흔들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차가 출발했고 나는 기우뚱하면서 맨 뒤창을 향하여 빨리 다가섰다. 잠깐 우산을 받쳐든 그네의 몸 자취가 보이더니 어둠 속으로 가뭇,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포장이 깔끔하게 되어있는 지방도로를 시외버스는 몇번 서지도 않고 달려갔다. 낯익은 고장에 이르자 나는 저간의 변화에 약간 속상하고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차부가 아닌 버스 터미널은 지금은 시로 변한 도심지 외곽에 있었다. 중앙로는 예전보다 훨씬 넓어진데다 사 오층 짜리 건물들이 들어서고 이따금씩 십여층은 되어 보이는 빌딩들이 덧니처럼 솟아올라 있다. 나는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섰던 택시에 올랐다.

어디 가쇼?

갈뫼까지요.

운전기사가 조금 난처한 기색이 되었다. 그는 아직 시동을 걸지 않는다.

왜요…무슨 문제가 있나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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