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메가케로스의 뿔

  • 입력 1999년 1월 3일 20시 09분


지금은 멸종됐지만 메가케로스라는 학명의 거대한 사슴이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뿔 때문에 최후를 맞은 비운의 동물이다. 서양에서는 상전이 많아 무너진 조직을 얘기할 때 메가케로스를 인용한다. 새해 벽두부터 메가케로스를 화두에 올리는 것은 지난 한해 우리 경제를 돌이켜보다가 떠오른 상념 때문이다.

★상전에 눌린 조직들★

정부가 그렇게 아니라고 하는데도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자율로 이뤄졌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정부가 주도했고 그것도 실무부서가 아닌 청와대비서실이 앞장섰다는 것이 수근대는 말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혼란의 시대에는 악역을 맡아야 할 존재가 필요하다.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악역의 범위와 권한은 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도 나름이지 엄연히 존재하는 행정조직이 늘 뒷전으로 밀려 치닥거리나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상전기관에서 앞장서다 보니 곁소리가 나올 틈이 없다. 빅딜에 반대하는 말을 꺼냈다가 ‘퇴출’당했거나 서슬 퍼런 경고를 받은 사람 또는 기관이 어디 한 둘인가.

정부부처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은 청와대비서실의 주문과 질타가 나올 때 마다 메가케로스처럼 고개를 숙였다. 마음까지 숙였는지는 의문이다. 상전이라는 뿔에 눌려 조직이 맥을 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사람들이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야당시절 김영삼(YS)정부의 비서정치를 비난했었다. 그리고 집권초기 작은 비서실을 역설했다. 말대로 비서실의 규모는 줄었다. 그러나 영향력도 함께 줄지는 않았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방송개혁 같은 미세한 일에 이르기까지 비서실은 드러내 놓고 전면에 나섰다. 그림자처럼 보좌하던 고전적 비서실의 모습은 슬며시 사라져 버렸다.

정치판의 개혁을 예고한 것도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서였다. 자율적이라는 재벌의 빅딜을 하루 전 세상에 터뜨린 것도 주인공이 같았다. 경제수석은 하루가 멀다하고 재벌을 압박하는 발언으로 한해를 보냈다. 이 나라 경제정책의 수장인 재정경제부장관이나 한국은행총재의 모습은 이미 텔레비전 화면에서 ‘구경’한 지 오래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지금은 방향잡기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비아냥거린다. 예전에는 청와대 따로 경제부처 따로였기 때문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공직자 사회에서도 불만들이 입에 가득하다. 드러내 놓지 못할 뿐이다. 빅딜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인사가 있었을 때 산업자원부의 한 국장은 필자에게 “지네(자기)들이 다 해놓고 왜 우리만 못살게 구느냐”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지네들’이란 물론 청와대비서실을 칭한다. 국책은행의 한 간부는 “관치금융의 근원지는 청와대”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관치의 수준도 5공 때를 능가한다고 덧붙인다. 개혁의 이름으로 ‘퇴출’당할까봐 아무리 지시가 잘못된 것이라도 그쪽에다 대고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고 한다. 일이 제대로 될리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야말로 공직사회에서는 복지부동이 최상의 생존책이 된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도 행정조직은 지시만 기다리는 데 익숙해지려는 모습이다.

특히 경제쪽은 실무자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꺼려한다. 비서실이 주도할 때 일의 효율성은 높아지겠지만 결과가 늘 최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사조직 교과서에도 나오는 비서정치의 병리적 폐해들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비서정치 병폐조짐★

대통령중심제에서 비서실의 권능은 어느 정도 요구된다. 우리나라 정부만의 일이 아니다. 내각중의 내각이라고 해서 ‘키친 캐비닛’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 김대통령처럼 조직이 거치적거릴 정도로 생각이 앞서나가는 경우 ‘말을 알아듣는’ 몇몇 참모에 의존하려는 경향은 더 강해질 수 있다. 문제는 비서실 역할의 정도와 영향력의 행사방법에 있다. 훗날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보다 조직에 일을 내리는 것이 대통령에게도 이롭다. 새해 비서실의 위상재정립을 기대한다. 정부조직이 메가케로스 운명을 닮지 않게 하는 길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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