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원칙없는 외자유치

  • 입력 1998년 12월 25일 20시 00분


‘급하면 상감님 망건값도 쓴다’는 속담이 있다. 급한 처지에 이른 사람이 체면을 팽개친 채 절차와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할 때 쓰는 말이다.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아래 들어간 이후 다급하게 추진되고 있는 외자유치가 이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최근 미국 질레트사의 국내투자 승인이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다.

▼다국적 거대기업 질레트사가 우리나라 로케트전기의 주식을 인수해 기업결합을 실현함으로써 이 회사는 국내 건전지 시장의 59.8%를 차지하게 됐다. 독과점의 폐해를 고려할 때 평상시 같으면 정부의 승인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독과점적 지위를 악용해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면 소비자만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5년간 가격제한 등 몇가지 단서만 붙여 승인을 해주었다.

▼삼성중공업의 중장비 사업부문을 스웨덴 볼보사에 매각할 때도 그랬다. 공장 부지내 그린벨트의 건축 제한을 완화해 준다는 정부의 각서가 첨부된 것이다. 외자 유치를 위해서는 법조차 양보가 가능하다는 전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특혜성 조건들은 외국업체에만 적용된다. 국내기업들은 불만이 가득하지만 분위기 탓에 목소리를 죽이고 있다. 정부가 흡사 족보까지 죄다 팔라는 식으로 기업을 몰아치기 때문이다.

▼급하다고 원칙을 무너뜨리면 다시 세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한번 전례가 만들어지면 밀려들어오는 외국자본의 까다로운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어진다. 역차별받게 될 국내 업체들이 그만큼 잃게 될 경쟁력을 생각하면 두렵다. 외자유치가 급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최소한 지켜야 할 기준은 있어야 한다. 경기회복 이후 특혜성 예외조건들이 몰고올 부작용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결코 부질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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