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희망없는 청춘의 희망,「태양은 없다」

  • 입력 1998년 12월 23일 19시 04분


97년 영화 ‘비트’에서 “나에겐 꿈이 없었다”고 독백했던 정우성을 기억하는가.

그가 스물다섯살의 삼류 권투선수가 되어 돌아왔다. ‘비트’의 감독 박성수와 함께. 도회적 세련미를 갖춘 이정재를 껄렁한 흥신소 양아치로 둔갑시켜.

99년 새해 첫날을 장식하는 ‘태양은 없다’는 희망없는 청춘의 희망을 역설적으로 그려낸 포토 에세이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되는 일도 없다는 것외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아웃사이더를 블루그레이톤의 현란한 영상속에 스케치했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도철은 한때 잘나갔으나 이제는 링에만 올라서면 앞이 가물거려 흠씬 얻어맞기만 하는 한심한 복서다.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처럼 종국엔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는 해피엔딩은 없다. 그에게 복싱이란 아무리 하고 싶어도,열심히 해도 안되는 것이 있음을 말해주는 ‘세상의 법칙’일 뿐이다.

이정재는 돈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뻔뻔스러운 사기꾼 홍기를 연기한다. 한탕을 꿈꾸는 그에게 개과천선이란 없다. 끊임없이 실망하면서도 그와 의기투합한 도철은 어느덧 홍기를 닮아간다. “야, 나한테 죽이는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말야…”하면서.

‘태양은 없다’라는 타이틀로 태양이 있음을 애써 강조한 감독은 그 근거로 도철의 저돌성과 홍기의 낙천성을 든다. 이를 표현하는 감독의 영상테크닉은 지극히 감각적이다. 젊음의 이면에 숨은 답답함과 쓸쓸함을 찍어내는 고속촬영, 4백㎜망원렌즈와 4천5백도의 색온도 조명으로 만들어낸 블루그레이톤, 몽타주와 교차편집을 활용한 영상실험…. 이를 통해 감독은 두 청춘의 등을 세상속으로 떠다민다. 너희 가슴속에 있는 태양을 찾아 떠나라고.

그러나 두 잘생긴 배우의 매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일까. 남자들의 우정을 그린 ‘버디 무비(Buddy Movie)’를 표방하고 있지만 스물다섯살에 처음 만난 두 ‘막가는 인생’이 어떻게 진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지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멀쩡한 장면으로 연결돼 보는 이의 호흡을 끊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제작사 우노필름의 정신은 단연 돋보인다.

〈김순덕기자〉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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