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1년/직장-가정의 변화]

  • 입력 1998년 11월 15일 19시 52분


회사원 이모씨(29·여)는 지난주 토요일 새벽 E메일에 연결시켜 놓은 무선호출기 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는 조금 짜증스러웠지만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E메일을 열어보았다. 발신인은 대학동기 남자친구인 박모씨.

‘자고 있는 줄 알지만 너무 답답해 메일을 보낸다. 새벽 3시야. 이제야 일이 끝났어…. 너무 지쳤다. 대학시절에 꿈꾸었던 직장 생활이 이런 것이었을까….’

박씨는 L그룹 계열 컴퓨터 프로그램 제작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지난 봄 회사 구조조정으로 팀장을 비롯한 동료들이 대부분 해고되면서 과장이 하던 프로그램 기획 및 전체 골격 잡는 일까지 떠맡았다.

‘몇달째 매일 야근이다. 격무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농담과 웃음이 사라진 사무실 분위기야. 옆의 떠난 동료 자리에는 인력파견 업체에서 보낸 근로자들이 와 있어. 올해가 가기 전에 또 한차례 구조조정 태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소문에 자꾸 초라해지는 기분을 버릴 수 없어….’

정리해고 명예퇴직 그리고 급속히 확산되는 연봉제…. IMF 사태이후 기업마다 구조조정의 태풍이 몰아친 1년간 ‘가족같은 직장’이라는 문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S전자 김모씨(28·여)는 퇴근 후 짬짬이 경영학석사(MBA) 유학을 준비중이다. 최근 갑작스레 남편(28)이 정리해고되면서 유학결심을 굳혔다.

“남편이 팀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지 않았다는 것이 해고 사유였어요. 신입사원이 어떻게 중요한 일을 맡습니까. 어떻게 회사를 믿고 일생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S사 인사팀장 김상현과장(34)은 요즘 회사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비유하며 “사무실이 살아남기 위한 경쟁장으로 변해버렸다”고 한탄한다.

동아일보 IMF시리즈 취재팀이 지난주 10대 그룹 계열사의 연봉제 도입실태를 조사한 결과 65개 기업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경영자총협회는 2000년에는 1백대 기업 중 70% 이상이 연봉제를 도입할 것으로 전망했다.

D그룹 계열사 정모과장(36)은 “IMF 이전 연봉제를 도입할 때 대부분이 기존 봉급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연봉을 책정했다”면서 “IMF체제 하의 연봉제는 임금 삭감 방편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연봉제를 실시중인 한 광고사의 김모부국장(40)은 “같은 팀 내에서도 성과급이 한해에 수백만원씩 차이가 난다”면서 “얼마전엔 내년 연봉이 낮게 책정된 직원이 술자리에서 상사의 멱살을 잡은 일도 있다”고 전했다.

IMF시대를 사는 한국의 직장인들은 ‘인간관계의 구조조정’까지 요구받고 있다. 부도난 광고회사에서 최근 의류업체로 옮긴 변모씨(31·경기 부천시)는 지난 1년간 관계의 ‘끈’이 뚝뚝 잘라져 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광고회사 근무시절 형제처럼 지내던 입사동기 10명 중 연락이 되는 사람은 재취업에 성공한 단 한명뿐. 그는 작년까지는 대학 동아리모임에 두달에 한번꼴로 참석했지만 올해는 발을 끊었다. 솔직히 후배들 술 사주고 밥 사주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주택건설업체인 우방이 직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동료 친지 친구들과의 접촉빈도가 줄었다는 응답이 80.6%에 달했다.

중소 무역회사 M사 과장으로 있다가 5개월 전 회사 부도로 실직한 박모씨(37). 두달 전부터 파출부로 나가는 아내(36)가 지난주말 저녁 갑자기 “나는 남의 집에 가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는데 당신은 왜 막노동을 못하느냐”고 고함을 쳤다. 박씨는 “다소곳하고 평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아내를 저렇게 지치게 만든 내가 미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 1월부터 10월말까지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된 합의이혼 건수는 6천8백5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의 5천97건보다 33.5% 늘었다.

‘IMF 고아’와 ‘버려지는 부모’도 급증하고 있다.

부모가 갈라선 뒤 고모의 보살핌을 받던 현주(5·가명)는 IMF사태 이후 고모의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지난달 서울 관악구의 한 보육원에 ‘한시적 보호아동’으로 맡겨졌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기아 유아 등 요 보호대상 아동은 97년 상반기 5천7백25명에서 올 상반기 6천3백53명으로 11% 늘었다. 자식의 실직으로 복지 시설에 맡겨지는 노인도 늘고 있다.

한양대 안병철(安炳哲·사회학)교수는 “미국에서는 29년 대공황이 부부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자녀들 인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줬다는 연구보고가 있다”며 “해체된 가정을 돌보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안교수는 ‘돈버는 것은 아버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어머니’라는 가족 내 성별 역할 분담에 대한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홍·이나연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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