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낙연/국회의원 답변서

  • 입력 1998년 10월 29일 19시 04분


시민단체가 국회 장기공전에 따른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의원 2백83명을 제소한 것은 꼭 돈을 받아내겠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국회가 할 일을 다하도록 의원들을 각성시키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의원들도 시민들의 진심을 헤아려 반성의 자세를 보여야 옳다. 그러나 의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민들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소송과 관련해 법원에 제출한 정당별 답변서에서 국민회의는 “당시에 소수당이었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했다. 자민련은 “원고의 목적은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 이미 충족됐다”는 태도를 보였다. 한나라당은 “정치적 책임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없다”고 답변했다. 박준규의장만 “너무 부끄럽다”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訴)를 취하해달라”고 원고측에 호소했다.

▼정치인들은 ‘우기고 보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많은 국민이 갖고 있다. 비리혐의가 나와도 마냥 잡아떼고 정치싸움에서도 개미 쳇바퀴 돌듯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도 그랬다. 시민들은 국회가 왜 그렇게 노느냐고 항의하는데 의원들은 ‘잘못이 없다’고 대꾸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국회의 기능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그토록 어려운가.

▼재판부는 29일 원고측에 대해 증거보강을 요구했다. 손해를 좀더 구체적으로 입증하라는 얘기다. 재판은 일단 의원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셈이다. 그러나 설령 의원들이 재판에서 이긴다고 해서 진정으로 이기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국회를 향한 시민들의 불신까지 치유되지는 않을 것같기 때문이다. 이번과 같은 소송이 도처에서 제기된다면 큰 일이다. 그러나 정치가 국민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더욱 큰 일이다.

이낙연<논설위원〉naky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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