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마구 뒤지는 계좌

  • 입력 1998년 10월 2일 18시 11분


남의 은행계좌를 마구 뒤져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금융거래에 관한 정보 요구는 그것이 설령 수사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거래자의 인적 사항 사용목적 요구하는 정보 등을 명확히 기재한 문서로 이루어져야 하며 엄격한 적법 절차에 따라야 한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의 입법 취지도 금융거래의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금융거래 정상화를 꾀하자는 데 있다. 그런데도 힘있는 기관들이 요건과 절차를 무시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면 그런 법이 무슨 소용인가.

현재 금융기관에 계좌 추적을 요구할 수 있는 기관은 검찰 국세청 국회 금융감독위원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이다. 감사원도 회계감사의 경우 계좌 추적권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자료 요구가 너무 포괄적이고 공문에 적시되지 않은 전산원장 전표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럴 경우 대상자의 거래정보 뿐만 아니라 제삼자의 예금계좌 비밀번호 등 개인 신상과 금융거래 정보까지 덩달아 유출돼 선의의 피해를 보게 된다.

일부기관에서는 정보요구 공문이나 압수수색영장을 팩시밀리로 보내는가 하면 심지어 기관장 직인만 찍힌 공문을 들고 나타나 현장에서 필요한 자료목록을 멋대로 적어넣는 경우도 있다니 기가 막힌다. 또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를 핑계로 기업에 대한 대출 등 필요이상의 자료제출을 요청하기도 하고 보좌관이 이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래서는 금융 거래의 비밀이 보장될 수 없다. 금융거래에 대한 자료요구는 요구목적에 부합하는 자료에 한해 최소한의 범위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실명제법은 이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같은 입법취지가 국가기관에 의해 유린된다면 금융기관 신용훼손과 국가전체의 신용질서 붕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도 중대한 침해를 받게 된다.

금융거래 비밀보호는 두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개인의 기본권 보장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 신용질서의 확립이다. 이런 점에서 계좌추적권 남용은 철저히 규제되어야 한다. 남의 계좌를 마구 뒤지는 식의 계좌추적이 계속된다면 예금의 무더기 이탈과 차명거래같은 편법금융거래 관행을 불러오는 등 폐해는 심각할 것이다.

최근 감사원과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직자 부정부패, 재벌의 부당내부거래 적발을 위한 계좌 추적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해서도 직무 범위의 일탈과 금융거래의 광범위한 노출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계좌 추적권 부여에 앞서 요건과 절차의 강화 등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부터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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