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기업형 농작물 서리

  • 입력 1998년 9월 21일 19시 13분


농촌 출신들에게 어린 시절을 회상시키면 아마 ‘서리’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수박 참외에서 무 고구마 닭에 이르기까지 군것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서리의 대상이었다. 서리에도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여러명이 집단으로 한다는 점.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밤시간을 주로 이용한다는 점, 현장에서 먹을 만큼만 한다는 점. 맛있는 것을 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놀이였다.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서리를 ‘범죄’로 여기지는 않았다. 먹고 남은 것을 집으로 갖고가다 들통나 물적 증거가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절도사건’으로 번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피해농가는 웬만하면 참고 넘어갔다. 서리의 도가 지나쳐 고소되더라도 동네어른들의 중재로 잘 해결되곤 했다. 일제시대에는 비교적 엄했던 모양이다. 서리혐의로 주재소(파출소)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고 나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70년대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이후 서리는 차츰 사라지는 추세였다. 농촌에서도 경제수준의 향상과 식생활 패턴의 변화로 굳이 서리를 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각종 채소와 인삼 고추 등 농작물을 대량 도둑질해 가는 ‘기업형 서리’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트럭 10여대와 인부 20여명을 동원, 밤새 1만여평의 배추밭을 싹쓸이해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 팔아 넘긴 일당이 붙잡히기도 했다.

▼실직자가 가족의 끼니를 위해 약간의 서리를 했다면 동정의 여지라도 있다. 그러나 범죄형 서리는 안된다. 농민들의 피땀을 송두리째 훔쳐가 떼돈을 벌어보려는 파렴치한 서리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무거운 범죄다. 농민들도 자위수단을 강구해야겠지만 당국이 손놓고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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