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현종/국민에게 용기준 「한국의 딸」이여…

  • 입력 1998년 7월 7일 19시 29분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에서 온 침착하고 조용한 한국의 딸은 마침내 전세계를 뒤집어놓으며 그린을 정복하는 축포를 터뜨렸다. 얼마나 장하고 아름다운 쾌거인가.

1998년 7월7일 새벽 동이 터올 무렵.

미국의 위스콘신주 쾰러 블랙 울프런의 푸른 초원에서 날아온 박세리의 승전보는 경제 한파로 위축되어 살맛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던 온 국민의 막힌 가슴을 시원스럽게 확 뚫어준 활력의 새빛이었다.

홍안의 태국계 흑인 청년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 챔피언으로 등극했을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최연소 골프천재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 장하고 아름다운 쾌거 ▼

그러나 이제 ‘동양의 진주’ 박세리가 그토록 우승이 힘들다던 98 US오픈 챔피언십을 쟁취함으로써 최연소 골프천재의 수식어는 박세리에게 옮겨졌다.

우승은 해본 선수가 한다는 말이 있다. 평범한 말 같지만 사실이다.

한번의 우승이 힘들지 다음 우승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를 차지했을 때 미국인들은 곧 이어 남은 중요 대회를 석권해 가장 어린 나이에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것이라고 들떴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골프 역시 공이 둥글기 때문에 예측을 불허한다.

경기 3일째까지만 해도 박세리와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며 숨막히는 대접전을 벌일 선수는 스코틀랜드의 매카이 그리고 스웨덴의 노이만으로 알았다.

메이저대회에 나서는 골프 선수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실력의 차이는 백지 한장이다.

뒷전에 밀려나 있었지만 호주의 캐리 웹이나 스웨덴의 소렌스탐, 영국의 데이비스 등 언제라도 우승컵을 손에 쥘 수 있는 선수가 즐비하다.

그런데 마지막날 느닷없이 무명의, 그것도 아마추어 선수인 제니 추아시리폰이 박세리의 우승 문턱을 막아서고 득의의 미소를 날리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동양인이라 모습도 비슷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그녀가 큰 눈을 껌벅이며 마지막 18홀 그린에 쭈그리고 앉아 10여m나 떨어진 괴상한 내리막 퍼팅 라인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 없어도 한번의 퍼팅으로 홀컵에는 담을 수 없다고, 핀대까지 2m쯤 남겨놓은 박세리의 우승을 당연한 것으로 안심하며 느긋하게 박세리가 그린 자켓을 입을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잠도 못자고 밤을 밝히며 중계를 보던 나는 안심하고 비로소 다리를 뻗고 누웠다가 그만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추아시리폰의 롱 퍼팅은 ‘어어’ 하는 사이에 홀컵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졌던 것이다.

‘우승이 사라지는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며 동타를 이루고 과자를 먹고 있는 추아시리폰의 천연덕스런 얼굴만 원망스럽게 바라보아야 했다.

이어 다시한번 잠을 설쳐가며 연장전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나 정작 박세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친구와 라운딩한 것처럼 담담했고 동타를 이루었을 때는 차분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는 냉정한 승부사의 모습을 감추고 인터뷰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보였다.

그렇다. 박세리. 네가 누군가. 자랑스런 한국의 딸이다.

비록 어른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온 국민이 고생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지만 한민족이 누구인가.

▼ 역경이긴 엄청난 저력 ▼

역경에 강하고, 한다면 하는, 그래서 뭔가 이뤄내는 저력이 있지 않은가. 그 저력이 단단한 땅을 굳게 버티고 선 박세리, 너의 그 믿음직한 두 다리에 걸려 있다. 우승은 꼭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박세리는 온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IMF의 지겹고 무거운 어깨의 짐을 한순간에 내던져버린 듯한 시원함과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고마운 한국의 딸이다.

부디 남은 메이저대회마저 거머쥐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세계 여자 골프사를 바꿔 쓰게 하라.

유현종(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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