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金대통령의 「장관 다그치기」

  • 입력 1998년 6월 24일 19시 18분


여행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일부 전직 대통령은 외국만 다녀오면 ‘붕 떴다’고 비서들은 전한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준비없는 세계화 선언도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대체로 정상외교는 성공하도록 짜여져 있다. ‘짜여진 성공’에도 그들은 도취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좀 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그는 미국에 다녀오자마자 장관들을 야단쳤다. 내일부터는 내각을 ‘중간평가’한다. 그의 방미는 성공적이었다. ‘짜여진 성공’이 아니다. 미국은 진심어린 박수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귀국 후에 더욱 굳어졌다. 왜 그랬을까.

미국의 박수는 주로 김대통령의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사선(死線)을 몇 번이나 넘은 사람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다. 거기에 ‘현재’에 대한 지지가 얹어졌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노선,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경제개혁을 이루겠다’는 다짐에 대한 지지다.

과거에 대한 경탄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남아공 만델라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2, 3년 후에 김대통령이 미국에 다시 간다면 이번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국정의 실적이 미국의 태도를 결정한다. 개혁에 실패하면 미국은 냉담해질 것이다. 미국의 냉담은 경제회생을 비롯한 국정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미국의 박수는 김대통령에게 오히려 부담일 수 있다. 그런 부담이 장관질책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의 ‘장관 다그치기’는 집요해질 공산이 크다.

장관은 중요한 자리다. 한 전직 총리는 “국정의 8할은 장관들에게 달렸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산하기관이나 위원회 통폐합을 장관들이 막기도 했다. 규제철폐는 해당부처 관리들이 방해한다. 중국 주룽지(朱鎔基)총리는 부총리 시절에 “동료장관들의 저항이 개혁추진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했다.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배경은 깊고도 많다. 재벌육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재벌개혁이 맡겨진 것 같은 진용의 약점도 있다. 게다가 김대중정부는 연립의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자민련은 오늘의 국정보다는 당의 정치적 장래에 더 관심을 갖는 것으로 비칠 때가 있다.

김대통령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김종필(金鍾泌)총리서리와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누가 천거했든 일단 임명하면 김대통령이 직접 관장하고 해임하는 것이다. 그래야 장관들이 한눈 팔지 않고 관료들도 따른다. 둘째는 안배원칙을 바꿔 경제를 국민회의가, 외교안보를 자민련이 책임지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김대중정부의 성패는 경제에 달렸다. 외교안보는 어차피 대통령과 외교안보팀이 정한 방향에 따라 움직인다.

2차대전 참전군인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를 물은 미국의 조사결과가 있다. 대통령, 성조기, 자유와 인권 등을 제치고 중대장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만약 탈영병들에게 ‘무엇 때문에 탈영했는가’를 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장 많은 대답은 역시 중대장이었을 것이다. 관료사회의 중대장은 과장 국장, 과장 국장의 중대장은 장관이다.

이낙연<논설위원>naky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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