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소떼가 연 판문점 길

  • 입력 1998년 6월 16일 19시 30분


소떼 5백마리를 앞세운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어제 방북(訪北)길은 통일을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날 감격적인 귀향길에 오른 정씨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소야 나도 함께 가자”며 애절해 하는 실향민들의 모습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남북화해와 평화의 상징인 소떼는 절절한 이산가족들의 염원을 안은 채 북으로 갔다. 밤새워 실려간 소들은 북한 전역으로 흩어져 그곳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사회의 폐쇄성으로 볼 때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소가 온 연유를 제대로 이해나 할지 의문스럽다. 김정일(金正日)의 시혜나 남한에 있는 한 재벌의 금의환향 선물 정도로 생각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아무쪼록 북한 주민들이 민족상봉을 염원하는 남녘 동포들의 따뜻한 정성으로 이 소들을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무엇보다 소떼에 실려 보낸 1천만 이산가족들의 망향과 혈육에 얽힌 한을 북한당국이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정씨의 판문점을 통한 입북은 지금까지의 남북관계를 볼 때 여러가지 함축된 의미를 지닌다. 민간인이 북한당국과 합의로 판문점을 거쳐 입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지난 7년 동안 의도적으로 군사정전위원회를 무력화시키고 판문점을 긴장과 대결의 장소로 만들었다.

따라서 정씨 일행이 소떼를 몰고 그런 판문점을 통과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북한의 대남(對南)정책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북한정권 내부의 온건파 등장 등 고무적인 상황변화라는 분석이 나올 만하다.

판문점 길이 확고히 뚫린다면 남북관계는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남북이산가족들의 면회소나 우편물 교환소, 경제교류의 접점 그리고 당국이나 군사접촉의 자리로는 판문점이 가장 적절하다.

남북을 오가는 데도 판문점 길은 지리적 경제적으로 제삼국이나 해로(海路)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온 남북간의 거리가 이번 기회에 더욱 좁혀지길 바란다.

정씨는 89년 북한을 첫 방문했을 당시 북한측과 금강산개발 등에 대해 합의했다. 그같은 합의가 이번에 실천된다면 남북한 관계는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남북간 민간교류의 새 장이 열리면 북한의 개방 개혁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낙관은 이르다. 북한이 아무리 판문점을 통한 정씨의 방북을 허용했다 해도 그것이 근본적인 대남정책 변화의 징조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북한의 태도는 여전히 적대적이고 불투명한 측면이 많다. 정씨의 방북 결과를 주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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