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이금희/그날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

  • 입력 1998년 5월 8일 07시 28분


6·25 전쟁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죽음같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 우리 4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백발이 될 때까지 자식들에게 베푸는 재미로 살다 가신 어머니….

해마다 어버이 날이 오면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며 4년이란 세월을 앉아서 누워서 고생하시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어머니는 그해 초가을을 우리집에서 지내고 겨울 문턱에 들어설 무렵 오빠댁에 갔다가 대퇴부 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았는데 노구로 끝내 극복을 못하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앉아서만 2년을 사시다가 차츰 눕는 날이 많아졌을 때 찾아 뵈었더니 “어서 죽어야지 왜 이리 안죽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셨다. “돌아가시다니요. 오래 사셔야 해요”하며 손목을 잡아드리니 화색이 돌았다. 죽고 싶다면서도 오래 사시라는 말은 듣기 좋았나 보다.

몇해 전 어버이날 때였다. 카네이션도 달아드리고 새옷도 입혀 드리니 좋아하시더니 “얘야. 너의 언니가 밥도 안주고 날 굶겨”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밥을 안주면 어머니가 살아계실 수가 있나요”라고 했지만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챙겨 드리니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좋아 하시며 탐식을 하셨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어머니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금방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소화를 못시키고 체한 모양이었다. 상태에 따라 음식을 적절히 조절하는 언니의 배려를 모르고 모녀는 굶긴다고 오해를 한 것이었다. 진정이 되신 뒤 땅거미가 질 무렵 언니의 차가운 시선을 등뒤로 느끼며 돌아오는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저녁 때만 되면 “얘야. 어서 가거라. 애들 저녁차려 줘야지”하고 말씀하셨는데 그날은 “얘야. 가지 말아라. 오늘 밤에는 나하고 같이 자자”며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러겠노라 해놓고 고3 아들의 새벽밥과 도시락 때문에 몰래 오빠댁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쓸쓸하게 숨을 거두셨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딸과 하룻밤을 지내고 싶어 했는데 그까짓 하루 아들의 새벽밥과 도시락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다.

이금희(충남 천안시 쌍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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