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골격 무너지는 實名制

  • 입력 1997년 12월 17일 20시 49분


정치권이 3조원의 무기명장기채권을 발행하고 1∼3년간 금융종합과세 시행을 중단하기로 의견을 모음으로써 금융실명제(實名制)는 한시적으로 유보될 전망이다. 그러나 말이 유보이지 실명제의 골격을 훼손하는 내용으로 일정기간 폐지나 다름없다. 실명제가 실시 4년4개월만에 실명(失名)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93년8월 실명제 긴급명령을 발표하면서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을 단절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김영삼정부의 유일한 개혁치적으로 평가되어 온 그 실명제가 그의 임기와 함께 운명을 다해가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시대적 요청이자 선진형 개혁정책인 실명제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보되는 데는 김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실명제를 지나치게 사정(司正)의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적지 않은 지하자금의 양성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온갖 불편과 사회적 부담을 감수하고 정착단계에 이른 실명제를 유보하려는 정치권도 문제다. 실명제가 자금흐름 경색의 주범이라는 재계와 일부 검은 돈 소유자들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소수 기득권층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자금의 산업자금화를 명분으로 실명제유보 공약을 제시한 3당 대선후보들도 개혁 후퇴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3조원의 지하자금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실명제를 포기하려는 계획은 신중해야 한다. 그동안 법을 지킨 사람은 손해를 보고 끝까지 버틴 사람에게 득이 돌아가는 불공정성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실명제 이후 금융자산을 실명화하면서 과징금도 물고 종합과세로 무거운 세금도 부담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기명채권 발행으로 거액의 지하자금 소유자가 종합과세에서 빠져나가고 자금출처조사도 면제받는다면 심히 형평에 어긋난다. 성실하게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낸 사람이 자꾸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실명제 유보를 추진해온 각 정당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시대를 맞게 되자 무기명채권을 팔아 실업대책기금으로 쓰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푼이라도 급한 상황인 만큼 3조원의 지하자금을 끌어내 고용보험재원으로 쓰기로 한 데는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더라도 본란이 여러차례 지적했듯이 실명제에 문제가 있다면 보완할 일이지 기본취지를 망가뜨려선 안된다. 무기명채권을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일정수준의 도강세(渡江稅)를 부과하거나 금리에 불이익을 주는 등의 보완조치로 최대한 형평을 기해야 한다. 아울러 실명제를 폐지하지 않고 한시적으로 유보할 생각이라면 이에 관한 일정과 방법을 국민에게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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