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아메리카 제국」의 위기

  • 입력 1997년 10월 3일 19시 57분


오랫동안 세계사는 로마에 견줄만큼 장구하고도 강력한 제국(帝國)을 갖지 못했다. 특히 근대의 제국들은 「팍스 로마나」 2백년에 비하면 거의가 제국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발흥에 가깝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나 대일본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오래 번성했던 대영제국의 「팍스 브리타니카」조차 1백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아메리카제국의 발흥은 그 예외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미국이 세계의 일류국가가 된 것은 벌써 1백년이 넘고 그 영향력을 전세계에 확대한 1차대전 참전을 기산점으로 쳐도 이미 80년이 지났다. 그러나 쇠퇴의 기색은커녕 오랜 대항세력이었던 소비에트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오히려 전에 없던 번성을 구가하는 눈치다. ▼ 패권주의 행태 노골화 ▼ 제국의 속성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관리가능한 권경(圈境)안에서는 하나의 제국만 존재하려는 경향이 있다. 로마도 처음부터 무적의 로마는 아니었다. 「팍스 로마나」로 가는 길목에서마저 파르티아란 적을 맞아 크라수스 군단이 전멸하고 군기(軍旗)까지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로마의 마지막 강적이었던 파르티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는 시기와 「팍스 로마나」의 종장이 비슷하게 겹친다. 위대한 제국의 멸망에는 한권의 책으로 써도 모자랄 갖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강력한 대항세력의 소멸도 한 원인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일치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은,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전세계를 관리가능한 권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도 20세기 후반 40년간 미국은 세계의 절반밖에 관리하지 못했다. 80년대 말의 소비에트제국 붕괴가 있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게 되었다. 여기에 로마사를 대입한다면 미국은 표면적으로는번성의 절정에 있지만 내면적으로는쇠퇴의 위기에이른 셈이 된다. 실제로도소비에트제국의 붕괴 이후 그런 조짐들은미국의 대외정책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대항세력 소비에트제국을 의식해 억제되어 있던 제국주의적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인상이 특히 그러하다. 이번에 미국이 한국에 발동하기로 결정한 슈퍼301조 같은 것도 그런 조짐중의 하나로 보인다. 한국은 이미 작년 한 해 1백억달러가 훨씬 넘는 대미(對美)적자를 기록했고 금년에도 벌써 적자 누계가 71억달러를 넘는다. 그런데도 자동차협상에서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국내법에 불과한 슈퍼301조로 보복하겠다고 으름장이다. 더구나 우리 방역당국이 네브래스카산 쇠고기에서 O―157대장균을 검출했다는 발표를 대하는 미국측의 태도는 이미 아메리카제국의 위기가 한 조짐이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자기들이 조사관을 보내 다시 조사해봐야겠다는 것은 한국 방역당국의 권위를 넘어 국가주권의 침해가 될 수도 있는 망발이다. 개별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족(蠻族)들이라도 동시다발로 반항을 시작하면 어떠한 제국도 견뎌내지 못한다. 로마가 멸망한 것도 본질적으로는 살길을 찾기 위한 대이동인 게르만족의 침입이었다. ▼ 「301조」각국저항 불러 ▼ 지금 세계경제는 미국을 빼고는 거의 모든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슈퍼301조를 휘두르며 자기들의 경제질서를 강요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을 쥐어짜면 그들은 감히 미국에 반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나름의 대이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거기서 아메리카제국의 진정한 위기는 시작된다. 이문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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