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조경란/이철수의 「소리하나」

  • 입력 1997년 9월 9일 07시 57분


[이철수 지음/문학동네 펴냄] K선생님께. 한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바구니 안에 사과가 세 개 들어 있단다. 거기에 네 개를 더 넣으면 모두 몇 개가 되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구니가 얼마나 큰데요?』 오래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이 짧은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요. 굳이 정형화된 사고나 고정관념에 대해 탓하려는 속내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겠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들을 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닐까요. 선생님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불교사상에 대해 그다지 해박한 지식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런 글을 띄우는 것은 얼마전에 읽었던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원(圓)이란 「비어 있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자아란 없음」의 무위(無爲)와 같은 의미이고 무위란 또, 소유 혹은 집착이라는 관념과도 비교될 수 있을거라 여겨집니다. 소리를 주제로 한 이철수의 판화산문집 「소리하나」에는 그런 것들에 관한 사유가 담긴 예순다섯 개의 둥그런 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판화가 이철수에게 원이란 소리를 담는 자리이고, 그 소리란 결국 무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덜렁 원안에 밥그릇 하나 그려놓고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그런가하면 아예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원을 그려놓고 「말없는 자리, 빈 자리, 넉넉하여 세상도 다 담겠습니다」라고 써놓기도 하는데 이쯤되면 쓴 웃음조차 나오지 않게 됩니다. 공연히 숙연해지는 것이지요. 비어 있음을 말하면서 「가득할수록 텅 빈 것에 가깝다」라는 진리를 최소한의 선과 소리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생님. 소유라는 관념을 버리면 진정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 이 책 한권을 보내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저 텅 빈 원 안에 과연 무엇을 그려넣으시겠습니까. 조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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