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누가 박석태씨를 죽음으로 몰았나

  • 입력 1997년 4월 29일 19시 52분


『큰 죄를 졌으면 아예 구속을 시키든지…. 고지식하고 마음 여린 사람을 전 국민이 보는 청문회장에 앉혀놨으니…』 29일 오전 서울 삼성의료원 영안실 14호. 날이 밝아오면서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朴錫台(박석태·59)전 제일은행상무의 빈소에는 「박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들에 대한 원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박씨의 한 고향친구는 『절간에서 요양을 하면 「잠적」했다고 난리가 날 것이고 기분전환하려고 외국여행이라도 가면 「도피」했다는 의혹을 살텐데 마음 약한 석태가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직장상사로 박씨를 5년동안 모셨다는 정모씨(48)는 『「몸통」들이 입을 굳게 다문 청문회에 나가는 「깃털」의 괴로움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씨는 『박상무님은 청문회 며칠 전 「죽음의 장소」를 찾기 위해 자유로를 달린 적이 있다』며 『「죽을 곳을 찾아 반나절을 헤맸으나 집 아닌 다른 곳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 억측을 낳고 윗분들에게 더 큰 부담만 줄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빈소를 지키던 박씨의 친인척들은 한결같이 『은행 높은 자리에 있으면 가까운 친척이 대출받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는데 단 한 번도 편의를 봐주지 않아 오히려 섭섭할 지경이었다』며 박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동정과 안타까움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 이같은 목소리들은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앞장서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박씨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라는 성토로 이어졌다. 그러나 신병교육을 받다가 달려온 박씨의 막내아들 松柱(송주·22)씨 등 유가족은 박씨의 영정 앞에서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몸보다 큰 상복을 입은 까까머리의 송주씨를 바라보던 한 중년의 조문객은 『장례가 끝나면 군대로 돌아갈 송주가 과연 이 나라의 무엇을 위해 젊음을 바쳐야 하는지 회의감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혀를 찼다. 〈부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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