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홍의 세상읽기]톰 행크스와 「포레스트 검프」

  • 입력 1997년 3월 25일 07시 52분


「화창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 있는 봄날은 그냥 오지 않는다. 꼭 며칠쯤은 음산한 날을 앞세운다. 추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으스스하게 떨리면서 공연히 허전해지는 그런 날 말이다. 이럴 때면 구름도 낮게 깔리고 그래서인지 기분마저 우울해진다.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은 날이다. 이럴 때 혼자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세시간쯤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할까. 아내와 단 둘이 모처럼의 자유를 즐기며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플 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이 나 잠시라도 꿈속에 머물고 싶을 때, 이럴 때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나는 이럴 때 영화를 본다. 늦게 얻은 둘째 아이 때문에 비디오로 대신할 때가 많지만 하여간 영화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가볍고 화려하며 웃음이 나오는 그런 종류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심오한 영화나 일대 서사시와 같은 장중한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2류에 속하는 영화들을 좋아하는 셈이다. 그리고 전쟁이나 재해를 소재로 하는 영화도 싫어한다. 인격이 그리고 인간의 품위가 무시될 수밖에 없는 장면은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 가족의 화평을 위협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영화도 질색이다. 영화를 이렇게 가리다 보니 주인공이 정의의 사도가 되는 액션 영화나 코믹 영화가 내 취향이 되었다. 그런 영화에 자주 나오던 배우가 있었다. 코믹한 연기, 보통의 소재, 그리고 해피엔딩. 그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이렇게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2류 영화였다. 나는 몇 편의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으로 배우의 이름도 모른 채 비디오 가게에서 그 배우의 얼굴만 찾았다. 1년쯤 지났을까. 톰 행크스라는 배우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무덤덤하게 지나쳤다. 그런 배우가 나오는 명작은 내 취향에 맞지 않을 테니까. 그 이듬해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보고서야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또 받았다. 그 후로 나는 그 배우를 좋아하다 못해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권위있는 상을 두번이나 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는 배우였는데…. 모르기는 해도 그는 기회가 올 때까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빛을 보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얻고 배웠다. 그리고 남들처럼 극중 대사도 몇 개는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명대사 Tomorrow is Another Day(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 오늘의 을씨년스러움은 화창한 봄을 부르는 전주곡일 것이다. 황인홍〈한림대교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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