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박완서/진드기의 시간

  • 입력 1997년 3월 23일 19시 45분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어서일 것이다. 사람들의 사는 방법이 자신에게나 이 사회에나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짓이 아닌데, 더 살면 무슨 꼴을 볼까 그 걱정 하나밖에 안남은 늙은이에게 더군다나 무슨 살 맛이 있겠는가. 이런 지면을 빌려서라도 속 시원한 소리든지, 하다못해 뾰족한 소리라도 한마디 할 수 있었으면 싶지만 남들이 이미 골백번도 더 한 소리밖에 생각나는 게 없으니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넌더리부터 난다. ▼우연히 고른 책 한권 시내에 나가려면 전철을 타는 시간이 긴지라 뭔가 안에서 읽을만한 것을 챙겨가지고 나가는 버릇이 있는데 어제는 「재미있는 인생」(성석제 지음)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들고 나가게 되었다. 순전히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런 제목이 눈에 띄었을 뿐 그 책이 나를 재미있게 해주리라는 생각같은 건 안했다. 오히려 「웃기겠다고 먼저 말하고 나서 제대로 웃기는 사람 못봤네, 이 사람아」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은 조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단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짧은 소설들이었는데 나는 그 중의 한편을 읽다가 그만 전철 안에서 비죽비죽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큰 소리로 허리를 비틀면서 한바탕 크게 웃고 싶은 걸 참는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러잖아도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흘금대는 게 흡사 치매 늙은이 보듯 하는데 소리내어 낄낄대 보라. 당장 구경거리가 되고말 것 같았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말았다. 텅빈 승강장 안에서 실컷 웃고나서 다음 차까지 몇편을 더 읽었는데, 그 안에는 웃기는 얘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 제일 짧으면서도 가장 섬뜩한 「몰두」라는 콩트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개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있다. 미친 듯이 제 몸을 긁어대는 개를 붙잡아서 털 속을 헤쳐보라. 진드기는 머리를 연한 살에 박고 피를 빨아먹고 산다. 머리와 가슴이 붙어 있는데 어디까지가 배인지 꼬리인지도 분명치 않다. 수컷의 몸길이는 2.5㎜, 암컷은 7.5㎜쯤으로 핀셋으로 살살 집어내지 않으면 몸이 끊어져버린다. 한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나올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다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경을 몰두(沒頭)라고 부르려 한다」. 너무 짧은 글이어서인지, 시간이 남아서였는지, 나는 한술 더 떠서 한층 징그러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몸이 끊어져버린 후에도 진드기의 입은 살아서 계속 피를 빨아댄다면 어떻게 될까. 무수한 진드기가 자신의 몸통을 제한조차 받음이 없이 욕심껏 피를 빤다면 개의 몸은 일순 피의 분수가 되었다가 곧 죽음에 이를 게 뻔했다. ▼떨쳐버리고픈 想像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리고 싶게 끔찍한 상상이었다. 다음 전철이 왔을 때 내 꼴은 아마 우거지상이었을 것이다. 짧은 글들이었지만 글이 사람을 풀어줬다 옥조였다 할 짓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짧은 글 중에도 우리의 천박해질대로 천박해진 삶을 객관화시켜서 보여주는 힘이 있었다는 건, 글이 좋아서든지 세상이 하 수상해서든지 간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완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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