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현철씨」보도와 언론의 회한

  • 입력 1997년 3월 23일 19시 45분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최근 사석에서 『賢哲(현철)이는 고집이 센 것까지 아버지를 똑 닮았다』며 『대통령의 (현철씨에 대한)사랑이 유별했다』고 지적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나 아버지의 자식사랑을 남들이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철씨가 30대 대학원생 신분으로 「소통령」행세를 하면서 국정을 농단(壟斷)할 수 있었던 위험하고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원인을 이밖에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모두 김대통령 부자의 허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현철씨를 둘러싼 의혹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요즘 말많은 여권대선주자들은 그동안 왜 「꿀먹은 벙어리」였는지, 야당은 견제와 감시의 의무를 다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언론 역시 본연의 사명에 충실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기자들 사이에 현철씨는 「건드리면 피곤한」 존재가 됐다. 기자들이 현철씨의 인사개입움직임 등을 뒤쫓을 때마다 청와대측은 갖가지 방법으로 제동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93년초 현정권 출범을 전후한 시기에 동아일보는 새 정부의 고위직에 내정되거나 임명된 사람들의 자격검증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전력이나 도덕성에 흠이 드러나 경질된 인사가 잇따랐다. 「어떻게 이런 인사가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결국 현철씨를 주목하게 됐다. 벌써 그때부터 현철씨 집에 각계 유력인사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서울 반포의 현철씨 집으로 찾아간 한 기자는 현철씨와 동행한 경찰에 연행됐고 편집국엔 『기자가 영식에게 행패를 부리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는 청와대의 항의가 잇따랐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후에도 현철씨 집주변을 감시하다 『야당시절엔 정보부와 안기부의 감시를 받았는데 이제는 언론이 감시하느냐. 이는 사생활침해다』는 청와대의 더욱 거센 항의를 받았다. 현철씨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구기동 집으로 이사했을 때에도 취재중이던 한 기자가 경찰초소에 한동안 감금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지난 95년 6.27지방선거 직후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현철씨가 공개적인 활동을 위해 사조직의 법인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가 청와대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자연 현철씨에 관한 보도를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김대통령이 오늘의 이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게 된 데는 현철씨와 관련된 언론보도를 봉쇄해 온 것도 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과보호가 이제는 김대통령 자신과 현정권의 존립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럼에도 정권초기부터 언론이 보다 집요하게 그를 감시하고 비판했다면 「살아갈 날이 더 많은」 한 젊은이의 불행을 막고 오늘의 이 국가적 위기를 예방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임채청 기자<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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