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공동체를 위하여]『최고아니면 안된다』무서운 1등病

입력 1997-03-13 08:41수정 2009-09-2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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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기자] 「온 세상 천지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내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또 주어진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그 모든 것은 나다/…/나는 나이며 나는 괜찮다」. 미국의 유명한 상담전문가 버지니아 사티어가 쓴 「나의 자존심 선언」중 한 대목. 국내 심리상담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글이다.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적성과 소질도 각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한명의 1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머지는 들러리로 세운다. 집단무의식속에 인간관계마저 서열로 정해 버린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아이들은 오직 1등만이 최고 가치라고 배운다. 버릇이 없어도, 일탈된 행동을 해도 1등이면 관대하게 용서받는다.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1등 못한 아이들은 부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독일에서 5년동안 살다가 1년반전 귀국한 주부 노효정(노효정·서울 개포동 경남아파트)씨. 『독일에선 음악이든 운동이든 한 가지만 잘해도 칭찬받았어요. 아직도 성적순으로 아이를 평가해 기죽이는 우리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1등병은 대학입학시험으로 증폭된다. 명문병이 깊다. 수석입학과 졸업은 늘 화제가 된다. 심지어 수석제도가 없다는 외국까지 우리 잣대를 들이대 해프닝이 생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유학생이 진짜 수석이냐 아니냐를 놓고 세상이 시끌벅적했다. 뭐든지 서열화하는 1등 만능주의는 교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양보가 없는 갈등과 분열, 비타협의 승자우월주의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잖아요」. 승자만을 부각하는 광고는 현실이 된다. 도로에서는 다른 차를 절대 끼워주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휙 달려나간다. 정치에서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완승주의가 판을 친다. 노동법문제처럼 여야가 토론하고 타협할 사안도 승부욕을 내세운다. 영예로운 패배란 없는 것일까.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숫자만 집계, 등수를 매긴다. 애틀랜타올림픽 결승전에서 한국선수단이 분패한 뒤 통곡하는 모습을 본 외국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메달도 소중한데 왜들 그러지』 그런 점에서 3초차로 아깝게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李鳳柱(이봉주)선수의 당당한 모습은 신선했다. 지금도 그는 『결과에 관계없이 항상 최선을 다한 삶에 만족한다』고 얘기한다. 다른 변화도 보인다. 지난달 25일 숙명여대 졸업식. 국내 처음으로 졸업생 전원이 단상에 올라 학위기를 받았다. 李慶淑(이경숙)총장은 『새 출발을 앞두고 똑같이 격려받아야 할 학위수여식마저 우등생 위주의 행사가 되는 관행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1등주의가 팽배한 까닭을 연세대 宋復(송복·사회학)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생물학적으로 동질성이 강한 단일민족이란 점 때문에 더욱 차별성을 갖고자 1등을 지향하게 됐다는 것. 다원주의가 아닌 획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란 점도 이유다. 하나의 가치만 통용되므로 「으뜸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뿌리깊다. 1등병이 만연한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힘들다. 우리의 꿈은 모두가 더불어 으뜸이 되는 세상.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패자는 없어야 한다. 잃어버린 공동체의 꿈을 복원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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