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이대론 안된다]『기업=私금고』천민자본 판쳐

  • 입력 1997년 3월 11일 19시 45분


[허승호·임규진·이희성·황재성기자] H증권 기업분석가 김모씨는 최근 경기 안산에 있는 중소제약업체 B사를 방문, 사장실에 들어섰다가 깜짝 놀랐다. 집무실이 각종 주식도표와 주식단말기로 가득차 있었다. 마치 증권회사 객장같았다. 이 회사 C사장은 증시의 주가 「작전세력」들을 수시로 불러 주가조작에까지 깊숙이 관여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섬유 건설업체 등 1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부산 소재 C그룹의 K회장은 명의신탁한 부동산 등 감춰둔 재산이 3천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계열사 대부분은 간신히 부도를 면할 만큼 재무구조가 엉망이다. 회장 비서실장을 지낸 C씨는 『K회장은 공장을 지을 때마다 먼저 친인척 명의로 땅을 사들인 뒤 회사에 비싸게 되파는 방법으로 회사 돈을 빼돌렸다』고 말했다. 회사 간부들은 노조원들에 의해 감금당하는 등 신상 위협과 수모를 겪어도 군소리를 못한다. 근로자들에게 「열심히 일하자」고 말할 처지도 되지 못한다. 『기업을 사(私)금고로 생각하는 천민자본가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무조건 돈만 벌면 된다는 탐욕의 화신들이 기업인 행세를 하는거죠. 이런 기업에 기술개발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李弼商·이필상 고려대교수) 모 그룹은 총수가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해당지역 담당자들이 브리핑자료 만들랴, 시중 들랴, 며칠씩 정상업무를 뒷전으로 미뤄놓을 판이다. 해외지점의 경우엔 총수의 까다로운 성미와 입맛에 맞게 의전 챙기랴, 식당에 특별주문하랴, 회장이 갑자기 뜬다 하면 바이어와의 약속을 바꾸는 일도 있다고 해외근무 경험자는 말한다. 『한국식당을 수배, 미리 콩나물국 북어국 김치찌개 등을 몽땅 주문해둡니다. 신 김치는 싫어하시기 때문에 겉절이를 준비하는 것이 특히 힘들지요. 느닷없이 매운탕을 찾으시면 난리가 납니다』(그룹비서실 관계자) 중소 금형제조업체를 경영하던 P씨는 노조가 들먹이자 지난 90년 회사를 정리하고 부동산 임대사업자로 변신했다. 낮에는 골프, 저녁에는 관리 등 접대로 바쁘다. 그는 골치아픈 제조업에서 손떼길 잘 했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그런 사람에게 「기업가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다. 「기업가정신 망각증후군」뿐 아니다. 독단 족벌 밀실 주먹구구 경영 등 전근대적 경영의 문제점이 잔존한다. 아파트업체인 K사의 전문경영인들은 지난 95년 자금난이 심해지자 보유 부동산을 처분해 대처하자고 Y회장에게 몇차례 읍소했다. Y회장은 『점괘를 보니 올해 사업운이 확 풀린다』면서 밑의 말을 묵살했다. 이 회사는 작년 8월 1차 부도를 내 법원의 재산보전관리를 받고 있다. 『위성방송사업 진출의 타당성을 분석해본 끝에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투자규모가 수천억원대에 달해 우리의 재무능력으론 무리였지요. 하지만 「회장님 필생의 꿈」이니 추진하라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H사 기획실관계자) 토목공사로 명성을 날렸던 Y사는 무능한 2세에게 경영전권을 맡겼다가 95년초 도산하고 말았다. 핏줄의 영광과 몰락이었다. H그룹 창업자 2세 C씨는 대리로 입사한지 4년2개월만인 30대초반에 부사장이 됐다. 일본 소니사에선 모리타 아키오회장의 차남 모리타 마사오가 입사 11년만에 오디오사업본부장으로 승진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한보철강 위탁경영팀은 이 회사 회생방안 마련에 애를 먹고 있다. 경영내용이 온통 비밀투성이여서 전문가적 판단 자체가 어렵기 때문. 이 회사 임원을 지낸 K씨는 『5조원대의 투자가 이뤄졌지만 그룹재정본부는 물론 경영기획팀도 정확한 투자내용을 모른다』고 말했다. 몇몇 재벌은 형제간 재산싸움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몇몇 그룹 비서실 사람들은 총수의 복잡한 여성편력 때문에 스캔들 루머만 떠돌면 가슴이 뜨끔하다. 모 그룹 총수의 아들은 티코승용차를 몰던 시민에게 건방지다며 구타를 했고 마약까지 복용했다. 이 그룹 L부장은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부하직원들은 주변 술집에서 폭음을 했다』고 말했다. 기업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속에서 기(氣)가 살아야 경제가 잘될텐데 일부 오너계를 비롯한 경영층의 비뚤어진 행태가 사라지지 않아 열심히 하는 기업까지도 한통속 취급을 받는 일이 많다. 그리고 이같은 행태는 근로자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린다. 『경영자부터 10% 일 더하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주중에 골프장 나가면서 생산성 운운할 수 없습니다. 세계흐름을 파악하여 비전을 제시하고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능력을 배양해야 해요』(南貴顯·남귀현 대우전자부사장) 『우리 중소기업들도 여건 탓만 하고 정부지원에만 의존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의타심만 키워온 셈이지요. 자생력 없는 기업들은 개방경제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李慶雨·이경우 서울샤프엔지니어링상무) 『기업이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경영내용을 공개해야 합니다. 기업발전이 근로자의 발전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李天鎬·이천호 현대그룹노조총연합 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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