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가족 기자회견]일문일답<1>

  • 입력 1996년 12월 17일 20시 00분


「李明宰 기자」 북한을 탈출, 홍콩을 거쳐 귀순한 金慶鎬(김경호·61)씨 일가족과 이들의 탈출을 도운 사회안전원 최영호씨는 17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탈출동기와 경위 및 북한사회의 실정 등에 대해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탈 출 경 위================ ―탈출과정을 설명해달라. ◇최현실씨(김경호씨 부인)〓남편의 고향이 남한이라는 이유로 평소 천대와 감시를 심하게 받았다. 76년9월에는 유일한 남동생이 남한방송을 들으려 했다고 해서 우리 가족이 평양에서 함경북도 회령으로 추방됐다. 남동생은 친구 3명과 함께 징역 15년형을 받았는데 아직도 소식을 모른다. 우리 가족은 계속해서 천대와 감시를 받아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됐다. 이런 도중에 부모님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으며 편지와 사진교류를 하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7월 어머니로부터 중국에 가겠으니 나오라는 말을 인편을 통해 전해받았다. 48년만에 어머니를 중국에서 만나 『한국에 가면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탈북권유를 받고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굳혔다.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 자녀와 사위들에게 의향을 묻고 탈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위들의 행동이 가장 걱정스러웠는데 이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데 의견을 모아 같이 탈출하게 됐다. ▼ 아이들 울음 터뜨릴까 긴장 ▼ ―탈출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고비는…. ◇김명숙씨(셋째딸)〓두만강을 건널 때와 동남아국가(홍콩)수용소에 있을 때였다. 두만강을 건널 때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병이 도질까봐 걱정했고 철없는 아이들이 소리를 내지 않을까 매우 긴장했다. 동남아국가에서 지낼 때는 신문과 방송에 우리의 탈북한 사실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안전이 걱정됐다. 혹시 북측이 테러를 하지 않을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제대로 못했다. ―탈출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최현실씨〓10월25일 저녁8시경 탈북해도 좋다는 연락을 최영호씨로부터 받고 맏아들집에 모여 탈북을 감행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릴까 봐 미리 준비해 놓은 수면제(20알)를 먹일까 생각도 해봤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몸이 불편한 남편은 두 사위의 부축을 받고 아이들은 딸들이 업은 채로 탈출했다. 두만강을 건널 때는 강을 건넌 뒤 옷이 젖으면 곤란하므로 바지를 벗고 강을 건넜다. 그 과정에서 마중나온 사람과 전지로 신호를 교신했다. 탈출과정에서 붙잡힐 경우 중국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처참하게 끌려갈 수는 없다는 각오로 쥐약을 준비하자는 이야기도 했으나 실제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최영호씨는 어떻게 김씨 일가족과 함께 탈출하게 됐나. ◇최영호씨(회령시 안전부 노무원)〓맏아들 금철씨와 친구관계다. 탈출하기 6일전에 금철씨가 찾아와 북한을 탈출하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해 생각해보고 결심하겠다고 답했다. 특히 전가족이 탈출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게 돼 탈출을 돕게 됐다. ▼ “金사망때 웃었다” 곤욕 ▼ 내가 두만강 주변에서 군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경비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성공적으로 탈출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북한을 탈출한 뒤의 안전을 알아보기 위해 금철씨를 중국에 먼저 보냈는데 연락이 와서 김씨 일가족과 함께 탈출을 했다.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 북경에서 관광을 하고 사진을 찍는 등 탈북자로 보기에는 너무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김금철씨(장남)〓목숨을 건 북한탈출에 성공한 뒤 연길과 심양을 거쳐 북경에 들어왔을때 너무나 걱정이 많았다. 특히 중국 공안당국이 이상하게 볼까 봐 일부러 연길에서 온 조선족 관광객으로 가장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탈 출 동 기================= ―월남자 가족(최현실씨 부모가 월남)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을 받았나. ◇김성철씨(차남)〓학교를 졸업할 때는 인민군대와 대학, 사회의 세가지 진출로가 있는데 최고로 취급하는 것이 인민군대다. 그러나 나는 월남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장 나쁜 사회에 곧바로 진출해 시계수리공이 됐다. ―부인 최현실씨는 북한에서 60년 가까이 살아 체제에 순응했을 것이고 94년7월 金日成(김일성)사망이후에는 추모도 했을텐데 어머니의 권유만으로 그렇게 쉽게 북한탈출을 결심할 수 있었는가. ◇최현실씨〓순응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 순응하는 체 했을 뿐이다. 남편은 고향이 남한이라는 이유로 무슨 임무를 받고 왔느냐는 등의 감시를 받아왔으며 같은 남한 출신을 감시하라는 과업을 받아 남편이 거절하는 바람에 계속해 감시와 멸시를 받았다. 나도 남동생이 정치범으로 몰리는 바람에 76년 회령으로 추방돼 감시를 받았다. 김일성 사망때는 웃음소리가 우리 집에서 들렸다는 이유로 회령시당에까지 보고돼 조사를 받았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강제로 애도를 표시해야 했다. ▼ 식량배급 1월이후 중단 ▼ ◇김명숙씨〓북한 당국의 감시로 인해 어느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어 북한에서 태어난 우리조차도 김일성부자를 섬길 수 없었다. ―해외친지의 경제적 도움은…. ◇최현실씨〓92년 8월경 부모님이 미국에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후 한 번에 5백달러씩 보내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그러나 당국이 이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게 했다. 보통 해외에서 친지로부터 돈이 송금되면 몇년 걸려야 찾을 수 있다. 보내준 달러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1백달러당 2백3원내지 2백5원 상당의 「바꿈 돈」으로 바꿔야 한다. 부모님이 약을 보내주신 적도 있었으나 평양국제통신국 보위원들이 가로챘다. ================식 량 사 정================ ―북한에는 굶어죽는 사람도 많다는데…. ◇최현실씨〓식량사정이 전반적으로 다 어렵다. 식량배급이 지난 1월이후 중단됐다. 병원이나 학교 등도 식량사정으로 인해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에는 모두 나가는 실정이다. ―굶어죽는 사람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최현실씨〓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강냉이죽 풀뿌리죽 등을 먹고 지내기 때문에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다. 영양실조로 인해 결핵 간염 등에 걸린 사람들도 많다. ―「분도도급제」는 어떤 것인가. ◇김금철씨(장남)〓올해초 북한에서 식량생산을 늘리고 농민들의 사기를 진작해 준다며 실시한 제도로 곡물 수확량의 일정분은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농민들이 나눠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농민들은 이제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겠구나…하고 기대가 컸다. 그러나 목표량이 너무 높게 책정된 데다 비료를 비롯한 영농자재가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성과가 극히 부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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