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우혜『전통-왜색잔재 혼동 말자』

입력 1996-12-02 19:59수정 2009-09-2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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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힘찬 손길이 바야흐로 성문(城門)이름들에도 닿으려 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당국은 『남대문과 동대문은 고유 명칭이 아니라 단순히 방향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며 일제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이라는 이유로 국보 1호와 보물 1호인 남대문과 동대문의 표기를 「숭례문(崇禮門)」과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우리 문화재의 창씨개명을 청산했다』는 찬사까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라면 표기를 그렇게 바꿀 필요가 전혀 없다. 두 가지 전제가 모두 틀렸기 때문이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아예 고유명사화된 성문 이름으로서 조상들이 매우 즐겨 쓰던 호칭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남대문 구멍 같다」는 말로 매우 큰 구멍을 일렀고 주소가 불분명한 편지나 이름도 모르고 집을 찾는 사람을 보면 「남대문 입납(入納)」이라는 말로 조롱했기에 요즘 국어대사전에도 그 말이 실려 있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옛 사서들에도 「남대문」 「동대문」이라는 호칭이 당당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때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피란에 나서던 급박한 상황을 기록한 「인조실록(仁祖實錄)」제33권 인조 14년12월 갑신조에 「상어남대문루(上御南大門樓:임금이 남대문 루에 올라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동야승(大東野乘)」제33권에 나오는 병자호란 발발 당시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조정에서는 적병이 이미 핍근해 온 것을 알고 동궁과 더불어 남대문으로 달려가니」라거나 「적병이 모화관으로부터 남관왕묘에 와서 진을 치고… 또 동대문 밖에 나와 진을 쳤는데」로 기술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제도(制度)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임금의 행차에 관계된 「남대문 봉도(奉導)」와 「동대문 봉도」라는 항목이 보인다. 우리 조상들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이라는 좋은 이름을 두고도 왜 그런 호칭들을 즐겨 썼을까. 우선 「남대문」 「동대문」이라는 호칭이 더 쉽게 그 문의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왕가나 궁궐의 이름을 보자. 옛 서적들을 보면 대전(大殿:왕 또는 왕이 사는 전각) 내전(內殿:왕비 또는 왕비가 사는 전각) 동궁(東宮:세자 또는 세자가 사는 전각) 대비전(大妃殿:대비 또는 대비가 사는 전각) 서궁(西宮:광해군때의 인목대비 또는 경운궁)에서 처럼 전각의 이름으로 그곳에 사는 왕실가족까지 지칭했다. 궁궐 이름 역시 동궐(東闕:창덕궁) 서궐(西闕:경희궁) 서궁(西宮: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이라는 호칭이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런 전통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졌기에 현재 우리 애국가 가사가 「목멱산 위에 저 소나무」가 아니라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된 것이 아닌가. 송 우 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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