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14)

  • 입력 1996년 11월 14일 20시 28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21〉 나는 애리를 향해 몸을 돌린다. 애리가 밀감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며 말을 잇는다. 『언니는 애인 없냐구. 내가 온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데이트하는 걸 못 봐서 하는 말이야』 『너 늦게 들어온 날도 며칠 있었잖아』 『그럼 내가 늦게 들어온 날 언니 애인이 집에 왔었던 거야?』 『그건 아니고. 밖에서 만났지』 현석은 거의 매일 전화를 했다. 그러나 만난 것은 점심 때 딱 한번 뿐이다. 그가 몹시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는 당장은 거리유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밤 거리 위를 날려 돌아다니던 신문지처럼 함부로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궁금해. 언니 애인 어떤 사람이야?』 애리의 물음에 나는 간단히 대답한다. 『몇 명 있어. 그 중에는 너 아는 사람도 있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언니 애인이 있었어? 누군데?』 애리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다. 나는 「놀라지 마라」라든가 「이 이야기는 정말로 하기 싫지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식의 사려깊은 서두 없이 곧바로 말해버린다. 『응. 이현석 교수』 애리는 한순간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한참 후에야 입을 뗀다. 『…그럼 내 얘기도 들었겠네』 『들었어』 애리는 다시 또 한참을 침묵한다. 이런 경우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상대가 가만히 있는 데에 조바심을 내서 미리 「미안하다」라든가 「나도 괴롭구나」따위의 변명을 하지는 않고 말없이 앉아만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애리는 살짝 웃더니 이렇게 말한다. 『언니라면 괜찮아. 내가 이선생님이라도 나보다 언니를 좋아했을 거야』 연적이란 이상한 것이다. 상대가 나보다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끔은 그 반대가 되어야 안심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 든 생각인데, 내가 선생님한테 품은 감정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어. 혼자 쳐다보기만 하면서 제멋대로 미화해서 키워온 감정이잖아.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즐긴 것 같아』 애리가 다시 웃음을 짓는데, 아까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언니, 그럼 이선생님하고 결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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