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눈에는 장효조…땀에는 이만수…찬스엔 김성한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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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7일 07시 00분


해태(현 KIA)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현 한화 수석코치)은 이규석 심판이 꼽은 ‘20세기 찬스에 가장 강한 타자’였다. 해태 시절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는 김성한 코치(가운데)의 모습. 스포츠동아DB
해태(현 KIA)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현 한화 수석코치)은 이규석 심판이 꼽은 ‘20세기 찬스에 가장 강한 타자’였다. 해태 시절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는 김성한 코치(가운데)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원년 심판 이규석씨의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회고 ③

최동원vs선동열? 프로땐 선동열 공이 더 위력
최고 컨트롤투수 장명부…심판 가지고 장난도

18년 심판하는 동안 딱 3명에게만 퇴장 선언
어필하다 퇴장당한 유지훤 덕아웃서 크게 혼쭐
난동부린 이정훈의 사죄·빈볼 후 팀 떠난 임창용


야 구팬들이 가장 궁금해 하지만 결론도 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누가 최고의 선수냐는 것이다. 대부분은 자신이 보았던 선수를 최고로 꼽는 경향이 있다. 이규석 심판에게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최고 선수’를 물었다. 타자로는 선구안의 장효조(작고)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심판보다 선구안이 좋았다. 소문이 워낙 나서 한 번 테스트해봤다. 아웃코너에 약간 빠진 볼을 일부러 스트라이크라고 판정했다. 장효조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는 신호였다. ‘그래 약간 빠졌지?’라고 했다. 스윙스피드도 빨랐다. 찬스에는 조금 약했다. 그래도 내가 본 최고의 타자였다. 찬스에 가장 강한 타자는 김성한이었다. 해태가 많은 우승을 한 이유가 있었다.”

○선동열 최동원, 누가 최고투수인가?

최고투수와 관련해 이규석은 기억을 되살렸다. “선동열이 최고였다. 누구는 최동원을 꼽지만 선동열은 프로가 전성기였고, 최동원은 아마야구 때가 전성기였다. 선동열의 공은 무시무시했다. 한창 때는 몸쪽에 공이 오면 심판도 움찔할 정도였다. 선동열이 던지면 타자들이 아예 엉덩이를 뒤로 빼고 타석에 섰다. 최동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타자들이 그 공에 배트를 맞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였다. 류현진보다 뛰어난 투수였다. 시기를 잘못 타고나서 그렇지 메이저리그에 갔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최동원에게는 다른 기억이 있다. 한양대 코치 시절 연세대와 대회 결승전에서 만났다. 그때 최동원의 공은 정상으로는 칠 수 없었다. 당시 주심이 김광철이었다. 주자를 1루에 두고 던진 공이 볼로 판정됐다. 최동원이 발끈했다. 성격상 같은 공을 또 던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타자 이승희(안양시 야구협회 이사)에게 무조건 치라고 히트앤드런 사인을 냈는데 이승희가 홈런을 날려 우승했다. 최동원의 커브는 지금 생각해봐도 최고였다.”

○심판과 컨트롤로 장난 친 장명부

‘최고의 컨트롤 투수’를 묻자 대답은 예상을 벗어났다. “장명부(작고)다. 최고였다. 심판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면 공 하나를 바깥으로 빼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유도했다. 그것을 잡아주면 하나를 더 뺐다. 나중에 볼로 판정하면 안쪽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능글능글했고, 기막힌 컨트롤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용덕이 국내파로는 최고였다. 아웃코너에 쉽게 잘 던졌다. 이상군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노력 빼면 남는 것이 없었던 선수 이만수

최고의 노력파 선수로는 이만수를 꼽았다. 한양대 코치 시절 만나 3년을 함께 했다. “그만큼 성실한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대학 시절 김동엽(작고) 감독은 이만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센스가 떨어진다며 정종현을 주전으로 쓰려고 했다. 나는 성실성을 높이 샀다. 팀이 원정을 가면 가장 안심이 되는 선수였다. 밤 10시 30분이 되면 이만수의 방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났다.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훈련을 하는 선수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도 있었다. 직업군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이었다. 이북 출신이었던 부친은 어릴 때 두 아들을 권투선수로 만들려고 했다. 매일 새벽 4시면 기상시켜 집 밖으로 내보냈다고 했다. 두 아들은 달리기를 하면서 새벽 추위를 이겨야 했고, 그러다보니 체력이 좋아졌다고 했다. 다른 운동 센스는 없었다. 한양대의 운동부 선수들이 모여 게임을 할 때 선수들끼리 자기편을 뽑는데 이만수는 항상 마지막에 뽑혔다. 이만수가 프로에 가면서 부친이 기념으로 구두 티켓 한 장을 선물로 줬다. 받아 본 유일한 뇌물이었다.”

이규석은 18년의 심판생활 동안 딱 3명의 선수를 퇴장시켰다. 유지훤(OB) 이정훈(빙그레) 임창용(해태) 등 프로야구 역사에 빼어난 기록을 남긴 스타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들은 왜 퇴장을 당했을까.

○심판에 어필하다가 감독에 그만…

OB 김영덕 감독 시절이었다. 3구 삼진이었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에 펄쩍 뛰었다. 확실한 스트라이크였다. 그래서 “너 또 그러면 퇴장이야”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뭐라고 항의했다. 즉시 퇴장을 선언했다. 유지훤은 덕아웃으로 들어가다 김영덕 감독에게 따귀를 맞았다. 심판에게 대들었다는 이유였다. 김영덕 감독은 젠틀했다. 어필도 심하게 하지 않았다. 김동엽 감독 후임으로 내가 한양대에 추천했던 인연이 있다. 김영덕 감독은 당시 북일고 감독으로 있었다. 한양대 측과 면담을 앞두고 “추천해줘서 고맙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상의할 정도로 경우가 바른 사람이었다.

○퇴장당하고 대구구장에서 난동부린 이정훈

1988년 대구 빙그레-삼성전이었다. 3루심이었다. 빙그레 이정훈의 체크스윙에 대한 판정이었다. 스윙을 했다고 신호를 보내 삼진아웃이 되자 내게 달려와 항의를 했다. 태도가 너무 당돌해 한 번 경고를 준 뒤 퇴장을 시켰다. 이정훈은 화가 풀리지 않았던지 3루 덕아웃과 복도 사이에 있는 유리창을 모두 깨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모습까지 모두 봤다. 다음에 대전에서 경기가 있던 날 김영덕 감독이 이정훈을 데리고 심판실을 찾아왔다. 나는 “저 선수를 왜 데려옵니까. 너 그런 식으로 앞으로 야구 잘 해봐라”며 돌려보냈다. 이정훈은 심판실을 나가지 않고 버티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이후 이정훈은 심판의 판정에 대해 크게 항의했던 기억이 없다.

# 대구야구장 난동의 역사

프로야구를 32년간 지켜 본 대구야구장의 3루 쪽 통로에서 난동을 일으킨 선수는 2명이었다. 첫 번째가 이정훈이었고, 두 번째가 박정태였다. 1999년 롯데-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이었다. 호세가 3루 관중석으로 배트를 던져 퇴장 당하자 롯데 선수들은 경기를 보이콧하고 철수를 했다. 이 때 박정태가 방망이로 통로의 유리창을 부숴버리면서 씩씩거렸다. 김명성(작고) 감독과 심판들의 설득으로 경기에 참가하기 전 박정태가 유명한 말을 했다. “오늘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 지면 다 죽는다”는 말이었다. 박정태와 이정훈의 별명은 ‘악바리’다. 대구야구장 관리사업소는 난동 뒤 빙그레와 롯데에 망가진 기물에 대한 변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퇴장 당하고 다른 팀으로 가버린 임창용

프로야구의 역사에 남는 경기가 벌어진 때였다. 1998년 시즌 마지막 3경기를 남기고 해태와 OB가 광주에서 3연전을 했다. 해태는 3경기 가운데 1경기만 이겨도 4위를 확정하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추석 때였다. OB가 처음 두 경기를 이겼다. 해태의 기가 꺾여버렸다. 마지막 경기도 OB가 크게 앞섰다. “당시 해태 포수가 최해식이었다. 경기 후반에 캐세레스가 나오자 나쁜 말을 했다. 캐세레스는 어느 정도 우리말을 알아들었다.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해태 벤치에서 “야 한 번 줘”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임창용에게 “빈 볼 던지면 퇴장이야”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러나 임창용은 빈볼을 던졌다. 당연히 퇴장이었다. 그 때문에 출장정지 처분도 받았다.”

임창용은 그해 12월 14일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이 포함된 1-3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가버렸다. 해태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공이 빈볼이었다. 임창용은 결국 해태에서 퇴장당하고 삼성에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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