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유승안, 선동열한테 만루포 친 날? 몰라, 눈감고 휘둘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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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4일 07시 00분


야구의 시작은 투수가 공을 던질 때가 아니라 포수사인이다. 실업야구 홈런왕 출신 포수, 그리고 프로야구 원년멤버.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천에서 포즈를 취한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현역시절 마스크를 쓰고 노히트노런을 4차례나 지휘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야구의 시작은 투수가 공을 던질 때가 아니라 포수사인이다. 실업야구 홈런왕 출신 포수, 그리고 프로야구 원년멤버.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천에서 포즈를 취한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현역시절 마스크를 쓰고 노히트노런을 4차례나 지휘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선동열 상대로 1년에 1안타 치던 시절
나도 놀랐고 야구계도 놀란 사건
정작 신문 1면엔 나 아닌 선동열 얼굴만

5년 설렁설렁 뛰고 서른에 전성기
이동석 등 노히트노런 마스크만 4번
타자와 수싸움하는 재미에 푹 빠져
20승 투수는 포수가 만드는 거야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바꿀 찬스를 잡았지만 눈앞에서 놓쳤다. 욕심이 넘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첫 5년간 대충했던 선수생활. 나이 서른을 넘어서 달라졌다. 야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프로야구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포함해 4차례나 대기록의 순간에 마스크를 썼다. 10년간 통산 92홈런 359타점을 올렸다. LG 유원상, 두산 유민상의 아버지. 프로야구 선수 출신 가운데 가장 자식농사를 잘했다. 경찰청 감독 유승안(56)이다.

○입단 테스트를 받은 최초의 알루미늄 배트 타자?

1975년 경동고 시절 ‘제2의 백인천’이라고 불렸던 대형포수였다. 동기는 투수 배수희. MBC 유니폼을 같이 입었다. 입단 테스트를 거쳐 1976년 한일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경동고 선배(권국용 씨)가 한일은행 주무로 있었다. 그 덕분에 여러 명이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나만 붙었다.” 큰 체격을 좋아하는 김응룡 감독 취향에 맞았다. 김 감독은 입단 테스트 때 나무방망이 3자루를 부러뜨리자 “넌 앞으로 알루미늄 배트 써”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1976년부터 대한야구협회는 알루미늄 배트를 정식으로 사용했다. 남보다 먼저 알루미늄 배트를 쓴 덕분에 실업야구에서 홈런왕도 3번 했다.

1977년 육군을 거쳐 1979년 한일은행에 복귀했다. 1981년 은퇴를 생각했다. 은행 업무를 시작하려고 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다. 고민했다. “솔직히 계약금 목돈이 탐났다. 언제 1000만원을 만들어보겠냐는 생각이었다. 당시 많은 선수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계약금 1300만원, 연봉 1200만원에 MBC 선수가 됐다. “돈암동 성신여대 앞에 레코드 가게를 열었다. 친구들과 함께 했다. 망했다. 1000만원을 투자해 300만원만 남았다. 가게를 넘기면서 권리금 500만원을 받았는데 증권사 친구가 돈을 불려준다는 말에 1000만원을 또 투자했다가 깡통을 찼다.”

○5년의 허송세월과 5년의 전성기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시작해 1991년 빙그레에서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야구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다. 처음에는 기대도 컸다. MBC 시절 백인천 감독이 좋아했다. “개막전에 4번타자에 포수를 맡았다. 나에게만은 백 감독 특유의 타격 자세를 고집하지 않을 정도로 인정해줬다.”

출발은 좋았다. 3월 27일 개막전에서 연장 10회 이종도의 만루홈런이 나오기 전까지 7회 동점 3점홈런 포함 4타점을 올렸다. 영웅이 될 찬스가 있었다. 연장 10회말 1사 2·3루였다. 삼성 배터리가 공 3개를 연속해서 뺐다. 4구째. 프로야구 개막전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 “이선희가 설마 치랴 하며 느슨하게 던졌다. 포수 머리 정도로 완전히 빠지는 공도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배트가 나갔다. MVP 욕심이 앞섰다. 투수 머리를 넘어가는 공이었는데 이선희가 기막히게 점프해서 잡았다.”

1983년 12월 12일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1984년 해태 선수로 한창 잘 나갔으나 6월에 2루로 슬라이딩을 하다 부상을 당했다. 오른발목이 부러졌다. 1년을 쉬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고 야구를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야구를 포기하라”고 했다. 유니폼을 벗으려던 차에 빙그레에서 불렀다. 새 인생이 열렸다.

“그때가 서른 살 무렵이었다. 경험이 생겨서인지 야구에 새로운 눈을 떴다. 야구는 경험이 중요했다. 내 야구인생의 전성기였다.”

프로야구 출신 중 야구선수로 자식 농사는 제일 잘 지었다는 소릴 듣는다. 유 감독이 빙그레 코치 시절 잠실중학교 2학년이었던 유원상(LG)을 지도하고 있다. 둘째 유민상도 두산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스포츠동아DB
프로야구 출신 중 야구선수로 자식 농사는 제일 잘 지었다는 소릴 듣는다. 유 감독이 빙그레 코치 시절 잠실중학교 2학년이었던 유원상(LG)을 지도하고 있다. 둘째 유민상도 두산에서 꿈을 키우고 있다. 스포츠동아DB


○노히트노런을 4번 기록한 포수

빙그레 시절 가장 기억나는 경기로 1988년 4월 17일 해태전을 꼽았다. 이동석이 노히트노런을 했다. 마스크를 썼다. “1984년 해태 시절 방수원과 프로야구 첫 노히트노런을 했다. 그 과정과 비슷했다. 이동석도 볼이 빠르지 않고 변화구 위주의 투수였다. 스타급이 아닌 것도 같았다. 6회가 되면서 대기록을 세울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유승안은 육군 시절 이선희와 2차례 노히트노런을 합작했다.

포수로서 대기록의 탄생 순간에 4차례나 있었다는 것은 행운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나는 훌륭한 포수는 아니지만 타석에서 타자가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잘 안다. 대기록을 앞두고 타자들이 막판 되면 어떻게 끌려오는지 알았다.”

8회에 마운드에 올라갔다. 이동석의 얼굴이 백짓장 같았다. “형님, 공을 못 던지겠어요. 머리에 아무 생각이 안 나요.” “눈 감고 생각 없이 던져. 내 미트만 봐.” 직구는 낮게, 변화구는 빠지게 리드했다.

해태 시절 방수원도 그랬다. 9회 유승안이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는 나도 멋모르고 했지만 이동석 때는 완전히 타자를 끌고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 타자와 머리싸움을 하는 것은 포커와 비슷하다. 포수는 그 과정이 정말 재미있다. 그래서 포수를 포기 못한다.”

그는 1991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 때 송진우와 8회 투아웃까지 퍼펙트를 만들었다. “컨트롤 좋은 투수가 성공하는 이유가 있다. 포수가 생각만 똑바로 한다면 타자는 못 친다. 포수가 타자의 느낌을 아는데 맞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투수는 컨트롤이 중요하다. 20승 투수는 포수가 만든다.”

○선동열에게 만루홈런을 친 첫 번째 타자

1989년 5월 9일 유승안은 한국프로야구를 놀라게 했다. 0점대 방어율의 신화를 만들어가던 해태 선동열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쳤다. “어떤 공을 쳤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눈을 감고 쳤다”고 대답했다. 그날 스포츠신문 1면을 패널로 만들어 집에 걸어뒀다고 했다. “1년에 선동열을 상대로 안타 하나 칠 때였다. 그런데 만루홈런이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쳤다고 했다. 하지만 홈런을 친 나보다는 선동열의 얼굴이 스포츠신문 1면이었다. 농담 삼아 기자들에게 항의도 했다.”

그가 꼽는 야구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1977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였다.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7관왕을 차지한 슈퍼루키 김재박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최종 5차전에서 김재박이 마무리로 올라왔다. 내가 3점홈런을 쳐서 우승했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1루를 돌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겠나.”

1989년 해태 김성한과 경쟁 끝에 타점왕을 차지했다. 막판에 기록 만들기 논쟁이 벌어졌다. “내가 타점을 올리면 누상에 나간 후배들에게 2만원씩 줄 때다. 그해 만루찬스 5번 가운데 4번을 성공했다. 문제된 경기도 있었지만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별로 좋지 않은 추억이기에….”

○야구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집념

1991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방송해설에 흥미가 있어 1992년 KBS 라디오 해설을 했다. 1993년 말 강병철 감독을 따라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2002∼2004년 한화 감독을 거쳐 2008년부터 경찰청 감독으로 있다. 선수생활보다 훨씬 긴 지도자 생활이다. 선수 시절 놀기도 많이 했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야구를 하지 않았지만 지도자로서 단 하나만을 본다. “절박함이다. 선수는 집념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원해야 한다. 그런 선수를 가르치면 답이 있다.”

경찰청 시절 양의지에게서 그런 면을 봤다. “최재훈 장성우도 그런 면에서 좋은 포수다. 앞으로 10년간 한국프로야구를 이끌어 갈 재목이다. 포수는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 감독이 떠들면 한 귀로 듣고 흘려야 성공한다. 포수가 내는 사인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결과만을 놓고 평가할 것이 아니다. 포수는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대신 블로킹을 대충 하거나 땅에 떨어지는 공을 잡지 못한 포수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유승안은?

▲생년월일=1956년 6월1일
▲출신교=경동고
▲실업야구 경력=1974년 한일은행∼1976년 육군경리단∼1979년 한일은행
▲프로경력=1982년 MBC∼1984년 해태∼1986년 빙그레(1991시즌 후 은퇴)
▲프로통산 성적=10시즌 787경기, 타율 0.263(2189타수 576안타) 92홈런 359타점
▲지도자경력=1994년 한화코치∼2003년 한화감독∼2009년 경찰청 감독


전문기자 marco@dob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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