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원조 멀티플레이어 KIA 이건열 코치 “글러브 4개 챙겨 다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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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7시 00분


12년 프로생활 동안 무려 8개의 챔피언 반지를 꼈던 KIA 이건열 코치(왼쪽). 그는 지도자로서 또 다른 꿈을 위해 오늘도 정진하고 있다. 그는 다른 팀 선수들에게도 존경 받는 지도자로 롯데 강민호와 잠시 익살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12년 프로생활 동안 무려 8개의 챔피언 반지를 꼈던 KIA 이건열 코치(왼쪽). 그는 지도자로서 또 다른 꿈을 위해 오늘도 정진하고 있다. 그는 다른 팀 선수들에게도 존경 받는 지도자로 롯데 강민호와 잠시 익살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5. KIA 이건열 타격 코치

선배 김성한에 밀려 만능 백업선수 역할
1루·외야서 뛰다 급하면 포수로도 출전
12년간 개인 최다 8회 우승 ‘잡초 신화’


“뭐, 제가 대단한 선수도 아니었는데.” ‘코치 그들을 말하다’의 5번째 주인공 KIA 이건열(48) 코치는 쑥스럽게 웃었다. 문득 ‘대단한 선수’는 누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인 뉴욕 양키스 요기 베라는 역대 최다인 10개의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에 큰 자긍심을 보인다. 일본의 야구영웅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사다하루(왕정치)도 역대 최다인 총 11회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갖고 있다. 프로야구팀의 존재 이유, 그리고 선수의 가장 큰 목표는 항상 우승이어야 한다. 팀으로 하나 돼 우승하는 것만큼 값진 기록은 없다. 이 코치는 19986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해태 유니폼을 입고, 1997년 은퇴할 때까지 프로에서 12년을 뛰었다.

● 12년의 프로생활, 역대 개인 최다인 8회 우승

그동안 몇 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을까. 이 코치는 무려 8번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프로생활을 통틀어 우승한 시즌이 그렇지 않은 시즌의 딱 2배다. 개인통산 8회 우승은 같은 해태 멤버였던 김정수 코치와 똑같은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다기록이다. 특히 이 코치는 투수와 유격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경기를 뛰었다. 한국 최초의 멀티플레이어. 그러나 다재다능한 능력이 준 달콤한 선물은 아니었다. 냉혹한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였다.

학생선수 이건열은 화려했다. 군산상고를 대통령배 정상으로 이끌었고, 동국대에 창단 37년 만에 첫 우승을 안겼다. 대학 때 태극마크도 달았다. 화려한 학창시절을 마감하고 고향 팀 해태에 입단했다. 그러나 같은 포지션 1루에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했던 강타자 김성한. 좀처럼 이 코치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해태 멤버가 정말 좋았어요. 어디 하나 만만한 자리가 없었죠. 특히 원래 포지션인 1루에는 성한이 형이라는 큰 산이 있었죠.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비연습 때면 다른 자리를 기웃거렸어요. 2루도 하고, 3루도 하고, 포수도 하고. 외야는 뭐 가리지 않고 다 했죠(웃음).”

국내 최초의 멀티플레이어

이건열 코치는 그 중 가장 전문적 능력이 필요한 포수도 곧잘 해냈다. 1루와 외야를 빼고 가장 많이 출장한 포지션도 포수다. “유격수는 거의 기억이 없고, 물론 투수도 안했죠. 포수로는 많이 나갔어요. 한때는 김응룡 감독께서 절 포수로 키워보려고도 하셨죠.”

멀티플레이어 이건열은 스타군단 해태에서 소금 같았다. 많은 경기를 뛰고 있는 최고의 백업이자 9명 모두의 경쟁자. “외야 연습도 스스로 택했어요.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한번 시켜주겠지. 그리고 언젠가 자리가 생기겠지’하는 그런 마음으로 했죠. 나중에 다시 1루에 가면 성한이 형이 ‘아따 너는 저기(외야)로 가라잉∼’ 그러기도 했죠(웃음). 여러 포지션에서 뛰었던 경험, 선수 때 글러브 3∼4개를 챙길 때면 속상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코치를 하다보니 그 때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선수들 마음도 이해가 되고.”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도 모든 포지션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꼭 필요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개인 스스로는 포기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갑자기 다른 자리로 나갈 때면 당연히 떨려요. 연습도, 경험도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확실히 내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 돌이켜 보면 확실한 포지션이 없을 때 타격이 참 안됐어요. 외야에 자리를 잡았던 몇 해, 그리고 김성한 선배가 은퇴한 뒤 1루수로 뛰었을 때, 그 때가 배트에 공도 잘 맞고 했죠.”

해태의 또 다른 해결사, 그리고 불운

이건열 코치는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단 5명만 기록한 연타석 홈런(1991년) 기록을 갖고 있다. 그만큼 큰 경기와 찬스에 강했다. 김종모 대신 주전 외야수가 된 1992년 2할7푼에 42타점을 쳤다. 김성한이 저물어간 1995년은 시즌 초 타격 1위를 다툴 정도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LG 김태원이 던진 공에 얼굴을 맞고 쓰러져 6주간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해 남긴 0.295의 타율이 개인 시즌 최고기록이 됐다.

이 코치는 말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제 자리가 생겼어요. 이제 조금 야구에 눈을 뜨려고 하니까 큰 부상도 당하고, 다시 돌아오니까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확실히 내 포지션이 있었으면 야구를 조금 더 잘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후회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팀이 꼭 필요한 자리에서 제가 뛸 수 있었잖아요. 제가 대단한 기록을 남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프로생활은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12시즌 뛰면서 8번을, 그것도 한 팀에서 우승했습니다. 워낙 훌륭한 동료들이 많았어요. 그들과 함께 뛰며 팀을 위해 내 역할을 했고, 8번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코치가 붉은 색 유니폼을 입고 뛴 12년 동안 선동열,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김종모, 이종범 등 수많은 스타가 영광을 함께했다. 그들처럼 화려한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해태의 전설’이 있기까지 멀티플레이어 이건열도 있었다. 그라운드에 쏟은 땀과 열정은 항상 뜨겁고 치열했다. 그래서 그 또한 당연히 ‘대단한 선수’였다.

이건열?

▲ 생년월일=1963년 4월 25일
▲ 출신교=월산초∼동성중∼군산상고∼동국대
▲ 키·몸무게=179cm·78kg(우투우타)
▲ 프로 경력
- 1986년 해태 입단,
- 1997년 현역 은퇴
- 1999년 쌍방울 코치
- 2000년 SK 코치
- 2001년 KIA 코치
- 2004년 LG코치
- 2006년 KIA 코치
▲ 통산 성적=896경기, 타율 0.240, 576안타, 30홈런, 252타점, 266득점, 55도루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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